[시를 다시 쓸 때까지] 05. 귀걸이와 눈물샘

글 입력 2019.05.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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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다시 쓸 때까지]

05. 귀걸이와 눈물샘

글. 김해서



귀걸이를 좋아한다.

수능을 마치고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귀를 뚫는 일이었다. 귀를 뚫거나 화장품을 산다는 것이 마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의식처럼 느껴졌나 보다. 나는 친구와 함께 충장로 시내로 나가 어린 애들이나 상대하는 조그마한 악세사리 가게에서 거사(?)를 치렀는데, 서툰 직원이 손을 댄 모양인지 며칠이고 상처 부위에서 진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설렜다. 귓불에 작게 딱 붙는 모양, 길게 목선으로 내려오는 모양 등등 가릴 것 없이 이런저런 귀걸이들을 부어 오른 귓가에 대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내 손으로 '나'를 위해 산 사치품은 아마 그게 처음이었을 거다. 무언가를 너무 갖고 싶으면 마음이 아프고 그것이 눈앞에 자꾸 아른거린다는 걸 모르고 살진 않았는데. 귀를 뚫는 게 마치 큰맘 먹고 저지른 일처럼 느껴질 만큼 그날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욱신거리며 눈물이 고여도, 시원했다.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침착한 정도가 아니라, 아기 때조차 칭얼거린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던 우리 집, 부산의 그 단칸방에서 살 적에도 옆집 사람은 내가 태어난 걸 몰랐다고 하니, 오죽 조용했을까. 우는 일도 잘 없었던 건지 엄마는 내가 안 우는 게 아니라 '못 우는 아이'인 줄 알고 부러 연한 팔뚝 살을 꼬집어 보거나 빨던 젖병을 빼앗아 멀리 던져 보기도 했단다.

이 성격은 한동안 어디 가지 않았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많은 나이, 먹고 싶은 과자가 많을 나이에도 입을 꾹 닫고 있는 편이었다. 딱 한 번, 아빠 등에 업힌 채 뚱한 표정으로 한 말이 전부.

'아빠, 아까 그거 나중에 꼭 사 줘'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의 장면을 그려보면 괜히 섧다. 키우기 쉬웠다는 엄마의 말도 섧다. 나는 울지 않았던 게 아니라 엄마의 걱정대로 울지 못하는 아이였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도 한다. 내가 내 부모의 삶에 생기기 이전에, 이미 엄마와 아빠가 자신의 울음을 너무 울어버린 바람에 내게 눈물을 물려주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실제로 나는 양쪽 눈물샘이 막힌 채 태어나 안과에서 바늘로 뚫었다.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인공적으로 뚫린 그 샘을 나는 내 슬픔과 욕망 앞에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랐던 걸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참 잘 운다. 서럽기도 전에 질세라 울어 버리기도 하고 행복하면 행복하다고 운다. 펑펑 울면서 내 몸 어딘가에 진짜 바다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을 품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난 아기 때보다 철없고 의젓하지 못한 셈이다. 어떻게 참나 싶을 만큼 모든 면에서 다 못 참겠다. 눈물샘도 뚫리고 귀도 뚫리면서 이 좁쌀보다도 작은 구멍들 덕분에 점점 '무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생기가 넘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내가 된 것이다.

이토록 소모적이고 덧없는 나를 바라보다가 별수 있겠나 싶어 쓰게 웃고 잊어보도록 한다. 매일 거울 앞에서 반짝이는 귀걸이를 달아보는 거다. 기뻐도, 슬퍼도, 내 맘 같지 않은 날에도.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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