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트레이시 에민, 상처를 애도하는 예술가 ① [시각예술]

뜨거운 시간은 가고, 남은 건 상처 뿐이지만
글 입력 2019.05.2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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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상처를 말한다는 건 쉽지 않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는 사랑과 반대다. 사랑은 자꾸만 이야기해야할 주제·행복한 주제로 인식되는 반면, 이별의 상처는 덮어두고 감내해야 할 주제로 인식된다. 사랑이 있다면 분명히 이별도 있는 법인데, 실로 우리는 이별을 한 뒤 새로운 사랑을 기다릴 뿐 그 사이에 놓인 슬픔의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김형경은 저서 『좋은 이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이트는 슬픔을 정상적 애도 반응, 우울증을 비정상적인 애도 반응으로 구분했다. 그가 제시하는 비정상적인 애도 반응에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상실(···) 등이 있다.

그는 잘 이별하지 못하면 병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슬픔은 내면에 깃든 생각과 감정을, 애도는 슬픔의 감정을 외부로 표현하는 상태를 말한다. (···)

애도 작업은 내면에서 작동하는 낡은 삶의 플롯, 어린 시절에 머물고 있는 내면의 자기를 함께 떠나보내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치유와 성장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애도 작업을 잘 이행하며 자기 자신을 잘 알아보게 되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된다.


이별의 상처가 주는 괴로움을 덜어내기 위해선, 참지 말고 자신의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차분하게 어느 정도 이뤄낼 수 있다. 그러나, 유명인이라면 고백으로 인해 감수해야 할 게 많아진다. 예술가가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 몇 백년 동안 나의 사생활이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다.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나의 치부를 평가 받는 과정을 누가 하려고 할까?

그러나 트레이시 에민은, 자신의 상처를 공개적으로 고백한다. 자신이 겪었던 폭력적인 경험들과 이별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과 공유한다. 다소 용기있는 그의 애도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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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은 1990년대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일컫는 YBA(Young British Artists)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영국의 유명 컬렉터였던 찰스 사치가 영국의 젊은 작가들을 모아 선보였던 전시에서 데미안 허스트, 게리 흄, 사라 루카스, 크리스 오필리 등과 함께 전세계적인 유명세에 오른 작가다.

터키 국적의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업실패와 이혼으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가족의 방패막 없이 자라던 10대 소녀 에민은 13살에 강간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가출했던 에민은 그 이후로도 성폭행, 임신, 낙태, 알코올 중독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극심한 시기를 보냈다. 엎친 데 덮진 격으로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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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그런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미술을 시작한 이후,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을 세상에 내 놓았다.

텐트 내부에는 지금까지 그녀와 함께 잤던 102명의 이름이 천에 아플리케 방식으로 수놓아져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흔히 잠자리를 성적으로만 연상한다. 그러나 잠자리는 연인과만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가족, 연인, 친구들과 함께 잠을 잔다. 에민의 102명의 이름에도 그의 불우한 성장사와 함께 했던 가족, 연인, 친구 그리고 낳지 않았던 태아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상대와 잠을 잘 때 많은 것을 공유한다. 상대의 체취, 말, 생각, 잠버릇 등을 바로 옆에서 숨결처럼 느낀다. 익숙한 냄새를 맡으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고, 낮에 하지 못했던 말을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풀어내기도 한다. 즉 잠자리란, 내가 여태 함께했던 사람들과 가장 솔직한 시간을 보낸 공간의 총집합체인 것이다.

불우한 시기를 보냈던 그는 밤이 불안했을 터이다. 어둠이 드리우고 나서야, 불안함을 상대에 털어놓으며 자신이 가면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문란함이 아니라, 은유적인 상처의 고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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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bed, 1998


미술관에 놓인 지저분한 침대. 어지러운 이불, 담배 꽁초, 잡다한 메모지들, 와인병,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스타킹, 먹다 만 음식…. 일상적인 물건이지만 주인의 불안정한 심리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배치 때문에 혼돈과 괴로움이 느껴진다. 터너상 후보까지 올라간 이 작품은, 그녀가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속된 사랑의 실패는, 그의 말마따나 '감정적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실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알코올에 의존한 삶을 살다가, 운 좋게 전시의 기회를 잡았다. 더는 미술계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에, '나의 회고전'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했을 정도였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전시였기에 자신의 아픈 기억 모두를 공개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리고 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치유받길 원하는지를 고백했다.

그의 진솔한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고, 이후 트레이시 에민은 설치미술가로서 자리를 잡게 됐다.





참고
정수경, 「폭력적 경험을 다루는 탈승화적 현대미술에 대한 고찰 」, 『현대미술학 논문집』, Vol.20 No.2, 현대미술학회, 2016
김형경, 『좋은 이별』, 사람풍경, 2009


[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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