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혐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지구 - 명왕성에서 [공연]

글 입력 2019.05.25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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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5주기를 맞아 세월호 사건과 그로 인해 희생당한 아이들을 추모하는 공연이 수차례 올라오고 있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글이 되고, 영화가 되고, 기억 속에 남기기 위한 어떠한 기록이 되는 순간들을 겪으며, 5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기도 하며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한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자기들끼리 놀러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라며 추모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교통사고와 비교하면서 왜 국가적인 추모를 해야 하느냐는 의문을 느끼는 사람이 주변에도 종종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으니 당분간은 놀러 다니지 말자’고 말하는 나에게, 우리가 놀았던 수많은 순간에도 아프리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있었는데 그것과 뭐가 다르냐고 따지는 반 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 친구의 말에 할 말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친구의 의견은 늘 한결같았다. 한창 촛불 시위를 하던 때에 할로윈 행사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비판하는 인터넷 여론에도, 정치와 상관없이 삶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였다.

나는 늘 조용한 편이었고, 그 친구는 자기 생각이 어떻게 판단될지 상관없다는 듯이 모든 의견을 강하게 내뱉는 편이었다. 나와는 꽤 다른 의견을 가진 친구였지만 그 애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 친구가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않았고, 가식을 부리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반에서 소위 잘나가는 무리와 우리가 싸움이 붙었던 날, 그 친구가 돌아서서 하는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차피 졸업하고 나서 우리 차에 기름 넣어줄 애들인데.”

그 친구는 채식주의자였다. 채식주의자는 고기를 먹자 않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건강도 있겠지만, 생명의 윤리를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채식하는 사람은 종 차별을 하지 않는다. 동물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에게서는 급을 매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람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사람이 나를 친구로 둔 이유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그래서 ‘성공’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니 정말 오싹했다.

대학에 온 뒤로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은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어쩌다 한번 근황을 주고받고, 이야기했지만, 6개월에 한 번 만나다 일 년에 한 번, 그리고 연락이 끊기기까지 나는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그 친구가 했던 매정한 말들이 메아리처럼 울려온다. 과거에 친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연락을 지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과거의 나는 여전히 내 속에 살아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기에, 어떤 이에게 연락을 계속해야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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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에서>는 세월호 사건 중 희생자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에 초점을 맞춘 공연이었다. 선장을 비롯한 관리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미흡한 대응에 배에 탄 대다수 사람들이 죽고, 정치를 풍자하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던 내 예상을 엎고 <명왕성에서>는 죽은 학생들이 명왕성에서 부모님을 위로하고,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형식으로 공연이 흘러갔다.

수학여행 전날 점심시간, 신나게 방송하는 아이들 두 명의 발랄함이 펼쳐진 다음 장면으로, 부모님들이 숨도 채 못 쉬며 달려가는 장면이 나타난다. 버스가 출발했다느니, 자동차를 안 가져왔다느니, 약도 없다는 알아듣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장면이 지나간다. 물 아래에 잠겨버린 배가 스크린 뒤편에 띄워지면서 그들의 공포가 확대된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가 교회 목사의 앞에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사람들의 훌쩍임을 끌어냈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미 죽은 아이들을 공연에 출연시켰다는 점이다. 첫 장면의 방송하는 아이들 두 명이 그대로 사회를 진행하는 대신, 그들의 말은 어딘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뚝 뚝 끊어진다. 무대 위에서는 약 1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노래를 반복하면서, 멈추는 순간에 아이들 한 명씩의 사연이 소개되고, 그들은 전혀 슬프지 않게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미안함과 사랑함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버퍼링이 걸린 것 같은 음악 소리는 어쩐지 공연장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게 할 정도로 오싹했다.

그들의 즐거운 음악과 신나는 노랫소리와 대비되게, 현실의 장면들은 우중충하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종교에 기대는 사람들, 잃어버린 자식을 기억하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부모들이 공허하게 아이들을 부른다. 아이를 잃은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이의 사진을 갖고 여행을 한다는 가족, 명왕성에 있는 그들의 아이는 인제 그만 자기를 잊고 가족에게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말이 가족에게 들릴 리가 없다.

친구의 손을 놓치고, 혼자만 구조헬기에 탔을 때 우연히 창문으로 본 친구의 두 눈이 잊히지 않는다고 하는 한 아이. 명왕성에서는 또 그 친구가 자기의 눈은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물고기들에게 쪼이고, 바닷물에 녹아서 없으니 똑바로 앞을 바라보며 살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반 아이 중 4명이 살아 돌아온 2학년 4반, 한 명은 도시를 떠나고, 한 명은 앓아눕고, 두 명은 군대에 갔었는데, 그들이 모여서 먼저 떠난 친구들이 묻힌 곳으로 가는 장면들.

아이들은 중간중간 다른 태도를 보인다. 어떤 때는 왜 자기들이 안내 방송 말만 믿고 가만히 있었는지를 후회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슬퍼하는 부모님을 위로하기도 한다.

공연 자체는 화려하지 않았고, 배우들도 능숙하지 않았다. 5년 전에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처럼 충격적이지도 않았고, 세월호 사건을 다 정리해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가지의 태도를 보이고 가는 것도 아니었다. 발밑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낯선 아이와 함께 구명보트를 꽁꽁 묶기도 하며, 그 두려운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외침과 아이들이 명왕성에서 부모님을 위로하는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이 연극은 사회 고발극이나 사건 정리 요약집이 아니라 그저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극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에게 인제 그만 그들의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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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누군가 나에게 자식을 낳을 거냐고 물어보면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 삶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했고, 잘 챙기지 못하는데 다른 이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고, 아이를 잘 기를 자신도 없었다.

지금, 나에게 자식을 낳을 거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낳지 않을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 몸속에 있을 때는 내가 오롯이 지켜낼 수야 있겠지만, 아니 요즘은 임산부석에 앉았다고 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세상이라 그것마저도 보장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더는 나의 일부가 아니게 된다. 아이는 자라서 점점 가정에서 나와서 학교에 가게 되고 사회를 만나게 된다. 머리는 좋고, 공부는 열심히 배워 자격증은 땄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가 가르칠 교육을 받고, 냉정한 친구들을 만나고 사회에 이리저리 치여서 한때의 나처럼 정체성마저 잃어버릴까 봐 걱정스럽다.

내가 살면서 만나는 고통은 내가 견뎌내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지게 되는 순간, 아이의 고통은 그보다 더욱더 심하게 다가올 것이므로, 이 세상에 아이를 내어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여자라는 이유로 갓 들어간 대학에서 낯선 남자의 무릎에 앉아 술을 마셔야 하는 벌칙을 받거나, 남자라는 이유로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며, 그런 이유로 학교폭력을 당하고, 그리고 그런 사회의 권력에 저항한다는 사실로 그 자체가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는 세상에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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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지만, 요 며칠은 뉴스를 꽤 많이 본 것 같다. 어떤 배우는 술에 취해서 먼저 타고 있던 20대 승객을 때리고, 택시기사를 때리고 심지어 진압하러 온 경찰까지 때려 500만 원의 벌금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웨딩홀 60대 사장은 부하 직원을 죽여버리겠다며, 벤츠로 들이박아 버리는 등 살인미수를 벌였다. 안 지 며칠 되지 않은 유명 밴드의 구성원은 학교 폭력의 주범으로 밴드 탈퇴를 했다는 소식도 보았다. 서울교대의 남학생 단톡방에서는 성희롱이 일상이었고, 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이 죄가 없다고 생각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3개월 된 새끼 강아지를 상대로 성관계를 했다는 남성의 이야기도 봤다. 새벽 4시 10분에 길거리에서 여자친구의 머리를 사정없이 발길질했다는 남자친구 이야기도 있었다.

수많은 사건이 말 그대로 빠르게 일어나고 빠르게 사라진다. 그 사건을 겪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평생과도 가까운 일일 것이지만, 미디어로 접하는 타인에게는 ‘킬링타임용’일 것이다.

어떤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해결책이 있다. 해결해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결국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너무나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지만, 또한 문제가 너무 많은 탓에 10초도 되지 않는 요약으로 그들의 세상을 일축해버리게 된다. 전부 다른 문제, 다른 사건을 “또”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일축해버리게 된다.

바뀌지 않는 세상에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내게 된다.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 너무 높은 곳에 있어 그들에게 닿지조차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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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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