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벼운 무기력을 견디는 하루 [사람]

오늘 바다는 풍랑주의보 발령
글 입력 2019.05.26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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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일을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 미루면서도 어딘가 근거 없이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마감 기한이 닥치면 어떻게든 죽 또는 밥을 쥐어 짜내는 편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죽, 아주 가끔 밥을 만들어내지만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죽이든 밥이든 쌀통에 쌀은 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집에 쌀은 커녕 생수도 없이 텅 비는 날도 온다는 것을 오늘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 말도 안되는 변명 뒤에 나는 내보이기 부끄러운 더러운 감정을 숨기고 있다.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서 정각부터 공부한답시고 SNS를 구경하다가 온 세상 사람들 다 열심히 살고 나만 뒤쳐지는 째지는 기분, 괜히 지기 싫은 마음에 별 것도 없는 갤러리를 뒤적이다 겨우 게시글 하나를 완성했는데 그마저도 구질하고 외로운 속내를 선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은 초라한 마음이 한데 뒤섞여 부글부글 끓다가 불 땔 부탄 가스도 없어서 도중에 식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 머리 속에는 미지근하고 물컹하게 굳어있는 썩은 감정의 냄비가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번 아웃 증후군'의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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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무력감과 울적한 기분이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는 것을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번 아웃 증후군은 일에 몰두한 이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찾아온다는데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극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기엔 자주 웃고 잘 먹고 잘 잤다. 옆에서 누가 팔을 잡아 당기며 “됐으니까 빨리 와.”라고 말해준다면 잊어버리고 슬금슬금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덮어두면 늦가을쯤 ‘진짜’ 번 아웃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한 번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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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남들 비슷하게 열심히 살아보려고 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나만 헐떡거리고 남들은 태연한 게 많이 못마땅하다. 자존심 상해서 나도 할만한 척 해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질 않는다. 남들도 나름대로 고충 있다는 거? 나도 안다. 근데 어쩌라고? 내가 보는 건 혼자 머리 싸매고 한심하게 끙끙대는 내 모습 하나뿐이다.


비스듬히 누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마시면서 여유 부릴 때는 생산적이고 여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웅크리고 있을 땐 그게 잘 안 된다. 사람이 예각으로 살 때보다 둔각으로 살 때 세 배로 행복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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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정체되어 있고 할 수 있는 것도 적은 인간이라는 것까진 알겠다. 그래, 다 좋다. 근데 내가 그동안 성장하지 못했다면 최소한 과거의 내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억울하게도, 나는 꽤 오래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게 퇴보하는 걸음이었던 모양이다.


그간의 일기를 미루어 봤을 때,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명확하게 주장하고 여러 가지를 해내고 많은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나’보다도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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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내가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기억하는 것만 적어도 서른 여섯 번은 이런 식의 먹구름의 나를 삼켰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죽을 것 같아도 결국 죽지 않았던 이상한 에피소드가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 한 뼘 자란 느낌을 만끽하며 얼마간을 보냈다. 그리고 또다시 흐렸다가 금세 볕이 드는 일의 반복이었다. 마치 날씨처럼 말이다.


지금은 이런 끈적하고 흐물흐물한 감정을 실컷 토해내고 있지만, 그리고 한껏 사로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이게 오늘 내 감정의 기상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유심히 지켜보고 살펴주지 않으면 태풍이나 장마가 되어 휩쓸어 버릴 때도 있다. 하지만 수십 번의 기상패턴을 지나는 동안 나 자신에게 주의보나 경보를 내릴 판단력은 얻게 되었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


이렇게 또 센 척 해봤지만 나도 내가 울적한 날씨에 들어왔다는 것만 알고 극복하는 방법은 전혀 모른다. 그래도 이런 감정이 ‘오늘의 날씨’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어깨에 짐처럼 얹혀 있던 것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어쨌든 오늘은 날씨가 궂어 풍랑주의보가 내려졌으니 닻을 내리고 바다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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