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의 총체로서의 철학에 관하여 [도서]

피에르 아도,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글 입력 2019.05.2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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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철학을 한다”는 것




“오늘날 철학 선생의 일에서 상당 부분은 또 다른 공무원을 양성하는 것이다. 고대에 그러했듯이 인간 구실을 하게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무원이나 선생 같은 직업적 전문가, 이론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비법과 관련된 특정 지식의 보유자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유의 지식은 결코 전 생애를 좌우할 수 없다.”


-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p422


 

철학을 공부한다는 소리를 듣고 흔히 떠올리는 광경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강의실 앞의 교탁에서 철학자의 견해를, 혹은 철학 사조를 설명하는 교수자와 그것을 경청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교수자는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평가하고자 시험을 준비한다. 학생들은 시험에서 그간 배웠던 모든 내용들을 시험지에 적는다. 어떻게 일련의 과정이 가능한가? 철학을 기술적인 지식의 일환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철학은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근본적으로 사유의 영역과 연관된다. 인간이 스스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대상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등이 그 예시다. 소위 철학적 문제라 불리는 수많은 사태와 인간의 사유는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철학을 배운다,” 다시 말해 “철학을 한다”고 할 때 위에서 말한 사유의 과정을, 세밀하게 거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특정 시대의 철학적 사상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학습할 때 요구되는 사유의 수준이 특출하게 깊진 않기 때문이다. 본 서적의 저자인 피에르 아도는 이처럼 사유의 깊이가 얕아질 때 문제점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지식을 습득하는 방향으로 철학의 목표를 설정하면 ‘사유’와 관련해서 이 학문이 지니는 특성을 간과하게 된다. 철학에서 적극적으로 동반되는 인간의 사유는 사유하는 주체 본인의 삶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할 때 그 방향은, 사유 대상의 전반으로도 향할 수 있지만 사유 주체 본인의 내면으로도 향할 수 있다. 아도는 후자에 주목한다. 그는 중세 이후부터 철학의 방향성이 이론의 영역에 포섭되었다고 비판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은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사유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양식’이다. 하지만 단순히 철학을 이론화하기만 한다면 소위 말하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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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풍경



따라서 그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철학을 이해한 후에, 그것을 구체적인 삶에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도는 이와 같은 실천철학의 뿌리를 고대 철학에서 찾는다. 철학이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고대 철학자로 유명한 사람들이 활동했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실천적인 양식으로서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본 글은 먼저 고대 철학을 실천철학으로 바라보는 아도의 견해를 삶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정초적 작업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작업에 선행되어야 할 근간으로 ‘최고선’을 살펴볼 것이다. 이후에는 결국 ‘철학을 한다는 것’이 ‘잘 살기 위함’이라는 필연성에서 비롯됨을 역설할 것이다. 한편 중세 이후부터 철학의 실천적 성격이 점차 흐릿해졌음을 살피고,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볍게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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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살고 싶다




2. 실천으로서 철학한다는 것 - 삶의 내적 지평선

2.1. 고대철학의 이념적 특징 ①: 삶을 위한 정초적 작업


 

아도가 책의 전반에 걸쳐 전달하고자 했던 고대 철학의 정신적 특징은 이 책의 제 1,2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철학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이전 시대부터,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헬레니즘 학파와 여타 제국시대의 철학 학파들을 ‘실천’이라는 주제 하에서 설명한다. 기원전 5세기경에서 ‘철학(philosophia)’이란 어휘가 처음으로 도래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소피아(sophia)’에 대한 기호이자 취미를 가리킨다. 인간이 무언가에 몰입함으로써 삶을 살아갈 명분을 찾는다고 할 때, 그 무언가는 소피아를 향한 개개인의 취미적 기준이다.


이때 소피아를 정의하는 개념은 명료하지 않다. 그래서 현대의 주석가들은 이를 지식의 개념으로 볼 것인지 지혜의 개념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상당히 갈등한다. 주석가들뿐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다. 현대 사회에서 철학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첫 번째 이미지는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논의’이다. 두 번째 이미지는 ‘그래도 인간의 삶에 직결되는 모든 경험과학적 지식들의 근본 토대’이다. 두 이미지는 동시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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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차야코프 박물관 앞 분수



그렇다면 지식의 측면과 지혜의 측면에서 바라본 각각의 소피아는 양립할 수 없는가? 아도는 양립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함이라는 당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 삶을 구체적으로 영위하는 것과 지식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곧 어떤 것들을 배워 삶의 신념에 적용할 것인가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단, 그는 둘 사이의 연관 관계에서 지식의 측면이 실천적 작업에 선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실천을 가능하게 할 토대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도는 고대철학의 정신적 특징이 삶의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는 삶 전체를 조망하는 정초 작업으로 고대철학을 이해하였다. 아도는 철학을 지식(노하우)을 습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실존에서 발현되는 단계로까지 의미범주를 확장한 철학자로 소크라테스를 언급한다. 사실상 소크라테스는 그가 지향하는 자아집중적이면서 자아확장적인 고대철학의 정신을 대표하는 뿌리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통념적인’ 차원에서 동의할 만한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삶의 주체로서 나 자신이 무엇을 선호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내적 반성에서 얻어진 성찰의 결과를 구체적인 삶에 어떠한 형태로 적용해야 하는지 등을 고민하는 게 우리가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이지 않은가. 소크라테스는 이렇듯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며 계속해서 엄격하게 캐묻는 것이 철학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후의 학자들도 비록 각자가 내린 철학적 결론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이렇듯 소크라테스의 입장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런데 아도는 정초 작업의 기반에 개별 주체들의 실천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근간으로 작용하는 초월적인 의미에서의 ‘선’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선은 개별 주체의 정초 작업이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최종 목표로 귀결된다. 비록 그것이 암묵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지라도 인간은 선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개인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선을 실현함 역시도 분리 불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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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창문 너머




 2.2. 고대철학의 이념적 특정 ②: 개별 주체들의 최고선


 


“플라톤에게서처럼 철학적 선택은 개인적 자아가 더 상위의 자아를 통해 자기를 뛰어넘도록 이끈다. 자기 자신을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관점으로까지 높이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신적 삶에 본래적인 이 역설은,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의 지혜 개념—『향연』에서 철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났던—에 깃든 역설과 상응한다. 『향연』에서 지혜는, 인간으로서 다다를 수 없으나 그것을 사랑하는 자(철학자)가 욕망하는 일종의 신적 상태로 묘사된다.”


- p141



우리는 저마다 ‘초월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미지를 떠올리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인 이미지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종류의 이미지들이 분명히 있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도덕윤리와 규범, 그리고 어떤 것을 이루거나 그것에 다가가고자 욕망하는 마음의 상태가 대표적이다. 전자의 경우 그러한 규범과 윤리를 지켜야하는 당위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처음으로 이 사회, 국가를 창립한 사람들의 결정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면,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결정을 정당화할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또한 후자의 경우, 목적의 내용이 다를 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단기적인 측면에서든 장기적인 측면에서든 특정한 무엇을 이루고자 한다는 의지는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은 더 이상의 넘어섬이 불가능한 “최고선”을 설정하여 그 명분을 찾은 것으로 사료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최고선 근원지는 개인의 내면성이다. 내면의 다이몬(daimon)이라는 신성한 음성이 개인으로 하여금 무엇을 가까이 하고 멀리할지 안내해준다고 말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도 소크라테스의 다이몬과 같은 신적 존재가 최고선에 개입한다.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는 정점이 존재하고, 하위의 모든 정신 활동들을 주관하는 존재가 상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신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철학이 지혜 그 자체는 아니지만 지혜의 이데아가 결정하는 담론이자 생활양식이라고 기술한다. 이때 자신의 무지함을 자각하고 이러한 생활양식에 따라 지혜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는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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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로 지혜를 <테오리아>의 완전성으로 이해한다. 위의 인용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그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상정한 지혜에 철학자 인간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적인 지성을 관조하는 순간도 삶에서 매우 드물다고 주장한다. 이들 이후에 등장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적 분파들도, 저마다 내리는 결론의 내용들은 차이가 있겠지만 이른바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영역을 모두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생긴다.


고대철학의 정신적 특징은 개별 주체의 삶을 정초해주는 작업이라는 점이었다. 단지 이론적인 담론에 머물지 않고 매순간 행위자의 삶에 관여하며, 행위자가 내리는 결정과 그의 행동 전반의 당위적인 명분을 제공했다. 그런데 아도에 따르면 고대철학은 이러한 작업이 단지 우연하게, 신비로운 힘에 의하여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 행해진다는 것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필연을 낳을 수밖에 없는 만물의 최고선을 전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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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여름궁전 근처였을 것



 

 2.3. 잘 살기 위함이라는 필연적 동기 - ‘내적 지평선’의 개별성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선택이 어떤 ‘좋음’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때의 좋음은 여러 개일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더 나아가, 여러 개의 좋음보다 더욱 상위에 위치한 궁극의 좋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최고선으로 명명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모든 좋음들이 결국 최고선 하나로 향하기 위한 수단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완전히 틀린 말도, 옳은 말도 아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좋음들 사이에 엄격한 위계 관계를 설정하진 않았다. 다양한 좋음들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나 공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좋음 1번과 2번이 있을 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 한 번쯤은 오기 마련이다.


이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개개인의 최고선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함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고선은 이러한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최고선은 필연성이라는 속성과 삶의 기준이라는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개별 주체들의 개별적 최고선들은 각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따라 상이하다. 그러므로 최고선은 개인의 내적 사유작용이 지향하는 최종 지점이므로 ‘내적 지평선’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내적 사유작용이란 개인이 자신의 내면적 최고선에 따라 구체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행위 전반을 가리킨다. 이는 개개인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를 제시하는 나침반과도 같다. 그래서 최고선은 필연성을 수반한다. 개인은 ‘필연적으로’ 최고선이 명하는 바에 따라 삶을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최고선은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에 따르면, 결국 고대철학에서 언급하는 최고선도 이와 같다. 좋음을 향해 사는 것은 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잘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철학을 하게’ 된다. 아도가 말한 실천으로서의 철학이란 이처럼 최고선이 개인의 삶을 더욱 잘 지휘할 수 있도록 현실적 차원에서 노력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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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또미스뜨르...... 뭐라고 써져 있다



  

3. ‘시녀’가 되기 시작한 철학: 고대 철학적 개념의 상실


 

아도는 고대 철학의 실천적 성격이 약화된 배경을 그리스도교가 대두한 중세에서 찾는다.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철학에 이런 문제점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그리스도교 철학은 철학적 담론이면서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철학을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유일하게 옳은 철학적 사조로 제시했다. 고대에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존재 방식으로 철학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들에게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고 교리를 삶에 실천하는 것이, 종교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히 옳은 일이었다. 그래서 종교는 곧 철학이었다.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로고스를 따라서 살아감은 종교를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임과 같았다. 고대 철학의 사유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증거다.

 


“고대 철학이 철학적 담론과 삶의 형태를 그토록 긴밀하게 연결지었던 데 반해, 어째서 오늘날의 철학 교육—일반적으로 철학사를 가르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에서는 철학이 주로 담론으로서 제시되고 있을까? 그것도 이론적, 체계적 담론 혹은 비판적 담론, 어쨌든 철학자의 삶의 방식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담론으로서 말이다.”


- p411


 

그렇지만 아도는 역사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가 급부상하면서, 그리스도교 철학에 가미되어 있었던 고대 철학적 개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종합한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철학이 뒤섞인 것이 시발점이었다. 신학적 논의는 신플라톤주의의 아리스토텔레스 존재론을 역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이른다. 처음에는 철학적 논의와 신학적 논의가 상호를 보완해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신학적 논의가 더욱 발전하면서 철학적 논의는 신학을 보조할 일종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아도가 말했듯이 철학은 신학을 떠받드는 시녀가 되고 있었다. 9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리스 철학은 계속해서 신학적 토론에 이용되었고, 13세기에서는 대학이 출현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번역서가 폭넓게 확산되며 신학부의 수업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철학이 쓰이고 있었다. 결국 ‘철학은 이 시대에 이러한 사상을 보이고 있었다’와 같이 철학을 지식으로 가르치는 오늘날 수업의 형태는, 중세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철학을 시녀가 되었다. 적절한 비유다. 차이점을 꼽자면 중세에는 신학을 보조하기 위한 시녀의 역할이었다면, 오늘날은 현대인의 교양 지식을 쌓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녀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제 삶의 양식으로 철학을 받아들여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부차적으로 기존의 철학적 사유들을 학습한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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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궁전 내부

입장료 엄청 비쌌는데 그래도 예뻐서 만족

 


 

4. 나가며: “철학을 해야”하는 이유


 

그렇지만 아도는 중세에서 오늘날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철학에서 고대 철학적 사유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고 역설한다. 아직 고대 철학적 사유는 현행적이며, 언제든 다시 현행화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견이다.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철학적 논변들을 실천하며 “철학할”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 특정 시대의 철학자들이 어떤 견해를 피력했는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철학적 논의들은 무엇인지를 역사적 사실로서, 혹은 하나의 이론으로서만 배우고 끝나는 것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과정일지 모른다. 진정으로 철학을 공부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비록 철학 사상들을 많이 공부하지 못했을 지라도 배운 것만큼은 자신의 삶에서 소화해보아야 한다. 피에르 아도가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일 거다. 단지 철학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습득하지 말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실험하라는 것이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직접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연결할 수 있어야 “철학을 한다”고 실질적으로 말할 수 있을 거다. 자신이 어떻게 삶을 감내하고 있는지를 그간의 철학적 모델들로 성찰해보는 것, 이것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철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다. 하지만 막상 철학을 공부해보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다고 기피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도의 논변은 인상적이다. 우리의 통상적인 이미지를 실제 삶에 적용한 사례가 다름 아니라 바로 고대 사회라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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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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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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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onymous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제 한 번 구매해서 일독해보아야겠네요.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눈 앞에 닥친 현실에 직접적으로 철학적 사유를 연결하는 일이 고대철학에서 소위 말하는 ‘좋은 삶’을 사는데 필수 불가결한 일임은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론으로 철학을 하는 것을 아예 ‘사이비 철학’이라고 말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분석과 객관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탐구의 대상과 어느 정도의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삶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윤리학적인 입장들을 생각해보면, 제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좀 잘 드러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쾌락주의를 삶의 입장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쾌락주의가 옳은지 논변하거나 생각하기보다는 쾌락주의적 입장을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것 같습니다. 특정 철학이 삶과 밀접하게 될수록 그 철학적 입장에 관한 탐구가 어려워지는 지점이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인간과 세계에 관한 근본적 문제를 다루는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마치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마냥 탐구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글이었습니다. 생각을 많이하게 하는 글이란 좋은 글이겠지요. 앞으로 기고도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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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2eon
    • 2019.05.31 11:2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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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onymous훌륭한 의견을 보태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분명히 고민하고 있는 지점입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철학을 한다고 말할 때, 그 방식이 지나친 일반화로부터 귀결된 탁상공론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역시도 일종의 일반화가 아닐까- 저 역시도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평생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일 수도 있겠네요. 말씀처럼 탐구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대체 어디까지 유지해야 '객관적'이라 볼 수 있는지조차 모호한. 철학이라는 학문은 제게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꾸준히 제 글에 코멘트를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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