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울증도 코미디가 될 수 있나요? [TV/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 맨>
글 입력 2019.05.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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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톱스타들에게 막말을 쏟아내고, 강간과 히틀러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려도, 아인슈타인을 잇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남자, 리키 저베이스. 한국에서는 오피스의 제작자로 유명한 그가 더욱 건조하고 수위 높은 코미디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울증을 품에 안고.


작년에 6개월가량 학교에서 상담 치료를 받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니, 원인은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그때의 정신적 고통은 내가 겪었던 그 어떤 육체적 고통보다도 아팠다. 그리고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부끄럽게도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택했다. 나의 힘듦은 무기였고, 괴롭힘을 무한정 받아주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겼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힘든 나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원해 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달라져야겠다고,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주위 사람의 끈질긴 위로나 구원이 아니었다. 내 모든 걸 받아주던 사람이 정말 지치고 힘들다고 말한 날, 나는 응석받이 생활을 청산하고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 맨>에서 토니가 우울증을 이겨내는 과정은 나의 작년과 놀랍도록 닮았다. 그는 아내를 잃고 매일 자살 충동에 빠져 지내는 중증 우울증 환자다. 욕조에서 진짜 면도칼을 들고 자살을 고민하지만 사실 정말 그럴 용기는 없다. 대신, 만나는 사람마다 시비를 걸며 멋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분을 풀 뿐이다. 1화부터 4화까지 토니가 멋대로 내뱉는 말과 행동은 끔찍하고 불쾌하다. 아무 생각 없이 '코미디'라는 해시태그를 보고 1화를 누른 사람은 아마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른 볼거리를 찾아 나섰을 공산이 크다.


그런 그의 기행이 정점을 찍고 이걸 계속 봐야 하나 싶을 때쯤, 토니 주변 사람들도 한계에 달한다. 언제나 착실하고 바른 행실로 토니를 위로하던 처남, 맷은 이젠 내 아들을 당신한테 맡길 수가 없다며 화를 내고, 꾸역꾸역 주선해 준 데이트 상대는 말로만 자살하겠다고 하는 건 다 쇼라며 그냥 죽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토니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만난 두 명의 인물을 떠올린다. 두 인물 모두 떠나버린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팀은 아내가 마약 중독으로 죽은 후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신 또한 마약 중독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마약 중독으로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는 자살할 만큼 충분한 약을 살 돈이 없다. 우리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말하는 토니에게 팀은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아내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 그 심정을 모른다고. 토니는 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며 그에게 자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준다. 토니는 아내가 죽고 난 후 처음으로 팀을 보며 자신의 고통이 정말 삶을 포기할 만큼 강렬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주저 없이 자살을 감행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가 꿋꿋하게 회사에 출근하고 밥을 먹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토니는 아내의 묘를 방문하다 우연히 공동묘지에서 죽은 남편의 무덤을 바라보는 앤을 만난다. 앤은 매일같이 남편의 묘를 바라보며 말을 걸고 그를 애도한다. 팀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녀는 큰 상실감에 허덕인다. 그러나 그녀가 택한 삶의 방향은 팀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토니에게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 세상을,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다고 토니를 설득한다. 토니는 처음에는 그의 말에 크게 동요하지 않지만 결국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토니가 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앤의 친절한 위로 때문이 아니다. 토니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던 처남 맷의 결혼 생활이 잘 풀리고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맷은 토니에게 '모두 문제를 안고 살지만, 티 내지 않는 것뿐'이라며 토니에게 화를 낸다. 정말 지치고 힘들 때, 다른 사람에게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슬픔과 고통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지치고 힘들 때, 그것을 깨닫기란 젊었을 때 청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 맨>에서 토니는 죽은 아내의 영상을 보고 불현듯 삶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는다. 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따뜻하고 친절한 위로를 통해 깨닫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흔하디흔한 로맨스 영화처럼 갑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삶의 의지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도 아니다. 단일 원인만으로 인생의 우울증이 마법처럼 사라질 수는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조금씩 나아질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행운아 토니와는 다르다고 절망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뎌야겠다고 느꼈을 때, 그 결심을 도와준 작은 호의들을 떠올리게 될테니 말이다.


감성적인 줄거리와는 달리, 토니는 신랄한 독설과 때로는 도를 넘는 막말로 유명한 리키 저베이스를 그대로 투영한 캐릭터다. 신랄한 독설로 종교와 동물 학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논하는 토니의 대사는 그의 스탠드업 코미디 논조를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리키 저베이스와는 달리, 토니의 말은 전혀 웃기지 않다. 간간히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올지는 몰라도, 이 짧은 드라마를 '코미디'라 부르기엔 해도 해도 너무 건조하다. 넷플릭스 분류 체계에 뭔가 착오가 있었나 싶은 정도다.


그러나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 맨>은 누가 뭐래도 코미디다. 개그 콘서트나 스탠드업 코미디처럼 대놓고 빵 터지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 불성실한 코미디언에게는 찌푸린 얼굴 속에서 끄집어내는 웃음이 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강경하게 유지해 왔던 시니컬한 시선에서 벗어나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는 점이다. 리키 저베이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의 모순적인 변화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이다. 어쩌면, 이번 작품은 그의 이러한 심경 변화를 은유적으로 그려낸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초반부의 고통을 조금만 참고 토니의 삶을 지켜보자. 그 끝에는 삶이라는 진흙 속에 묻힌 진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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