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여행]

#2 가사로 바라보기
글 입력 2019.06.0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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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2 가사로 바라보기 


Opinion 민현




[0] 비행기



여행이라는 복잡한 과정은 설렘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두려움같은 게 아닐까. 13시간의 비행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생각했다. 잠에 들지 못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고 비행기 공기는 무겁게 내려 앉는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더 커졌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나름 외로움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비행기에 홀로 있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비행기에서의 두려움과 함께 싸워 준 것들은 미리 다운 받아 온 넷플릭스 영화와 이상하게 오는 잠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설레는 여행기를 쓰려는 계획은 깔끔하게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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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arcelona in the rain



짐을 찾고 나가니 8시쯤이었는데, 해가 중천이었다. 9시가 넘어도 밝아 혹시 내 시계가 잘못된 건가 했지만 현지 시계를 보니 그건 아니었다. 아.. 스페인에 도착했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 와닿은 건 9시에도 떠있는 해였다. 스페인에 씨에스타가 있던 이유가 그냥 여유로운 낮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낮이 4시간 긴 것 뿐이었다.


씨에스타가 없었던 나는 9시에도 피곤했다. 어깨에 맨 10kg의 가방은 점점 더 나를 짓눌렀고 13시간의 비행에 지친 나는 어서 빨리 자고싶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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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셀로나 구엘 공원 정상
 


비가 쏟아지는 바르셀로나는 꿈과 같은 도시였다. 스페인이라는 나라도 꿈과 같은 곳이었는데 첫 느낌은 솔직히 좋지는 않았다. 서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고 유럽의 냄새는 음.. 처음에 적응하기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로 나서면 어느새 그 느낌은 사라진다. 사람들이 흔히 걸리는 ‘유럽병’의 발원지가 아마 바르셀로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의 두번째 모습은 정말 꿈과 같았다.


바둑판 같은 거리를 메운 유럽식 건물들은 우리나라의 고층 빌딩보다는 한참 낮지만 훨씬 더 웅장하게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그 건물들이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의 커피 잔을 거울 삼아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건물들이 수군거리는 듯한 빗소리를 피해 테라스에 앉은 사람들은 담배를 태우며 물을 타지 않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유가 느껴진다. 스페인에서 나름 대도시에 속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표정엔 여유로움이 잔뜩 묻어난다. 그 길을 걸어다니고 있으면 자연스레 나도 21세기 사람이 아니라 몇 세기 전 사람이 된 것 마냥 느껴진다.



* 외로움


한국에서 나는 사람들을 먼저 찾는 성격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건 좋지만 누군가를 찾게 되는 건 싫다. 이런 내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지만 나는 혼자 있는 것도 나름 즐길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외로웠다. 여행지에서 겪는 외로움은 한국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크게 느껴진다. 혼자 이 넓은 땅덩어리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좀 서글프기도 하다.


그러다 우연히 동행을 만났다. 보조 배터리만 들고 잭을 가져오지 않은 실수 때문에 금방이라도 핸드폰이 꺼질 급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아이폰을 쓰고 있던 여행자에게 감사하게 빌릴 수 있었다. 바닷가 도시만을 여행하는 그 여행자와 바르셀로나의 홈구장 캄프누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캄프누에서 나누는 리버풀 팬과 첼시 팬의 대화는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즐거웠다.


그리고 나서 또 다양한 동행을 만났다. 호스텔에서 경계심에 가득찬 나에게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주었던 미국에서 온 여행자도 있었고, 맥주를 한 잔 마시며 한 달 전 프라하에서의 로맨스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자들은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끔 홀로 외로움에 힘들 때 그렇게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가는 듯 했다. 그렇게 적응하는 바르셀로나 4일의 과정이 나를 관광객이 아닌 진짜 여행자로 만들어주는 튜토리얼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에서 외로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것, 그리고 내가 선택한 외로움은 한국에서처럼 나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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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셀로나 벙커
 


그렇게 여행자가 된 나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웨이터에게도 Thank you가 아닌 Gracias라고 대답할 줄 아는 여유, 비행기 옆자리에 탄 아기에게도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바르셀로나로 올 때보다 세비야로 가는 비행기는 너무도 편안했다.




[2] 굿바이 세비야!



스페인 남부의 작은 도시, 나름 스페인 축구 리그의 강호 정도의 이름으로만 알던 세비야는 생각보다 더 작은 도시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바르셀로나보다 아기자기했다. 안달루시아, 나는 이 지방에서 일주일을 넘는 시간을 보낸다. 가장 스페인다운 지역, 아프리카와 머리를 맞대고 누운 이 지방엔 옛날부터 유럽에 진출하고 싶었던 아랍인들의 흔적이 물씬 묻어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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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비야 메트로폴 파라솔
 


생각보다 추웠던 바르셀로나를 떠나 이제 정말 스페인에 왔다는 걸 세비야에선 날씨로 느낄 수 있었다. 4일 동안이지만 한식이 고파질 것 같아 세비야에선 한인 민박을 예약했다. 유럽이 가득한 호스텔을 떠나 한글이 써있는 곳에 누우니 들뜬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는 듯 하다. 거리로 나가 걸어보니 아기자기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바르셀로나보다는 키가 작은 건물들이 서있다. 딱 그 첫 걸음에 세비야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들은 말을 타고 다니고, 뒤에 따라 붙은 차들은 말이 걸어갈 때까지 조심스럽게 기다린다.



* 배낭 여행


‘배낭 여행’은 이제 과거의 낭만이 되어버렸나보다. 커다란 배낭을 들고 2달을 여행한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놀라곤한다. 어떤 아저씨는 그런 불편함까지 감수하며 여행하는 나의 젊음에 부러워했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맥주를 한 잔 건넸다. 20살의 환상 그대로 배낭 하나 메고 떠난 여행길은 물론 고난과 불편함의 연속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여행과 달리 예산도 궁핍하다. 성당 그늘에 앉아 2유로짜리 ‘bocadillo de pollo’로 점심을 해결하고 무료 입장을 위해 땡볕에서 기다리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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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하듯 여기저기 바쁘게 다닐 필요가 없다. 돈은 없어도 시간은 많기에, 예전에 못했던 여행지에서의 여유를 만끽 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강가에 가서 2시간 동안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아무 일도 안해도 된다. 비싼 비행기 타고 와서 시간을 낭비하면 어쩌나 걱정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내일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기에 밤에 맥주 한 잔을 하다가 거리의 악사와 함께 기타를 칠 수도 있다. 이렇게 배낭여행은 나를 잠깐 떠났던 스무 살때의 그 낭만과 환상을 깨워주었다. 오랜만에 정말 행복했다.


세비야에서 여행의 첫 주가 그렇게 지나갔다. 명소를 찾아다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혼자만 남는 시간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불쑥불쑥 이것저것 한국에서의 고민거리가 생각 나긴 하지만 저 풍경으로 눈길을 돌리면 금세 그 생각은 사라진다. 길을 걷다가 이사벨 다리가 보이는 강가에 앉았다. 세번이나 이 곳에 와서 앉으니 내가 세비야에 살고 있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금방이라도 모든 걸 태워버릴 듯한 햇살과 그 햇살을 달래는 선선한 바람, 그리고 빛나는 강물, 이 모든 것들이 좋다. 여행에 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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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비야 이사벨 다리
 


그럼에도 친구 가족들에게 연락이 오면 지금까지 내가 이 글에 담았던 모든 걸 얘기할 수는 없다. 신나고 즐거운 일들 위주로 얘기하다 보면, “와 정말 부럽다.” 혹은 “여행 진짜 잘 하고 다닌다.” 등 부러움과 안도의 반응이 나에게 온다. 하지만 이제 일주일을 갓 넘긴 나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지금까지 겪었던 일보다 정말 힘든 일도 있을 것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아무 것도 찾지 않은 방랑자의 여행의 출발선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아직까지도 나를 걱정하고 있을, 출발선에서 나를 배웅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안부의 말을 적어본다.






Voice Talk


불안으로 내민 첫 발

설렘으로 남긴 두 번째 발

조금은 가벼워진 그 다음 발


생각보단 조금 다르더라

사름들도 생각보다 착하고

무심한 시선만 한가득

아직 낯설기만 해


*

처음엔 엄청날 줄 알았지

앞뒤가 뒤바뀔 줄 알았지

변한 건 밟고 있는 땅과 하늘

모든 게 그대로야


내가 좀 달라질 줄 알았지

말을 더 많이 한다던지

변한 건 길어진 해와 짧은 밤뿐

모든 게 그대론데


잘지내, 걱정돼, 이제 더 낯선 말들

반쯤 늦은 대답으로 대신해

반갑게 맞은 낯선 인연은

자유롭게 흐르듯 떠나고


생각보단 더 외롭더라

사람들도 생각보다 차갑고

불필요한 생각만 한가득

아직 낯설기만 해


*

처음엔 엄청날 줄 알았지

앞뒤가 뒤바뀔 줄 알았지

변한 건 밟고 있는 땅과 하늘

모든 게 그대로야


내가 좀 달라질 줄 알았지

말을 더 많이 한다던지

변한 건 길어진 해와 짧은 밤뿐

모든 게 그대론데


어딘가 변한 것 같다고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익숙해진 게 아닐까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나도 아직 잘


*

이제 그만 줄일게 여기까지 

이제 또 언제 연락하지

걱정은 그만 밥도 잘먹을게

모든 게 괜찮을 거야


작사 민현




[손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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