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가 그녀를 청순가련이라 하였는가, 오페라 나비부인

글 입력 2019.06.06 02:0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KakaoTalk_20190604_235338100.jpg
 

[Review]

누가 그녀를 청순가련이라 하였는가

오페라 나비부인


나비 '부인'을 보러왔는데, 부인은 어디가고 사춘기 청소년이 있다. 성악가의 인상이 하얗고 앳되어 보여서 더 그럴까, 청순한 비극의 여주인공은 찾아볼 수 없다. 극 중 나오는 남성 캐릭터의 대사로만 따지자면, 그녀는 분명 동양여성에 덧씌워진 판타지의 화신이다. 인형같고, 아름답고, 어린 신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백인 남자와 결혼했지만 영원한 순정을 맹세한다. 그런 기대가 당시 초초상을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푸치니가 정말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렸는지는 모르지만, 좀 더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한 현대에서 생활하는 내가 본 초초상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 이미지와 정 반대였다.

극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권력 차이에서 처음 불편함을 느끼긴 했다. 무책임하게 아이를 남겨두고 떠난 외국인 남편의 이야기는 당장 가까운 나라와 우리나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이 동양인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 판타지에 있다면, 그 문제가 흐려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문제는 이 이야기의 중심 소재가 아니다. 나비부인이라는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시피,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초초상이 있다. 처음 나비부인은 주체라기보다는, 판타지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데 당시에 오페라를 대세로 만든 것도 기득권 남성층이었을 것이다.



23.jpg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아직도 차별이 존재하지만, 그때와는 또다른 비평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프리뷰에서 예고했듯이 미국과 일본, 남성과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내려놓고 감상했다. 물론 윤리적인 문제도 제한다. 초초상이 버리고 간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핑커톤과 초초상의 관계에서 식민지배를 연상하지않는가,하는 문제는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초초상과 핑커톤을 다양한 맥락이 존재하는 하나의 인물로만 바라보려 한다. 삶에 권력이 발휘하는 힘은 매우 강하지만, 그런 영향력 아래에서도 인간은 그 나름대로도 자신만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차별과 고통만 가득한 삶이라도 삶의 원동력과 희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술의 이야기거리다. 다양한 권력구조에 얽힌 초초상이지만, 그녀를 현실의 청순가련한 부인이나 피해자로 놓는 것은 오히려 매력을 놓치게 될 것이다.

필자가 그런 방식으로 실제 만나본 초초상, 마담 버터플라이는 생각 이상으로 생생한 인물이었다. 그 즐거움의 근원에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활동하는 초초상이 있다. 초초상은 사랑하는 남성에게 버려져 자살한 비운의 여인이라기보다는, 다소 극단적인 환경에서 환상을 가졌지만 행동력이 강해도 너무 강한 인물이었다. 생각해보니 무대 위에 흐르는 어떤 판타지 때문에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굉장한 주체성을 띈 행동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오페라를 감상하는 내내 초초상의 별명, '마담 버터플라이'라는 호칭을 다시 곱씹어봤다. 그리고 오페라를 다 감상하고 나오는 길에 영화 <레이디 버드>가 생각났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청소년 주인공은 이름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길 바란다. 그녀의 보호자같은 존재인 스즈키가 초초상에게 조언을 하지만, 초초상은 듣지 않고 스즈키의 뺨을 때린다. 초초상은 사춘기 소녀처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핑커톤에게 바친다. 레이디 버드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길 바랬던 것처럼, 초초상은 버터플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길 바란다. 핑커톤이 처음 그녀에게 지어준 별명이 버터플라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미국인이 되겠다고 한 것도 '초초상'이 아니라 '버터 플라이 부인'으로 있고 싶어서였다. 사실 필자는 이런 면에서 그녀가 청소년 같다고 느꼈다.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은 대학 신입생 파티에서 자신을 자신의 이름으로 소개하고, 부끄러웠던 자신의 고향을 자신감 있게 소개했다. 하지만 초초상은 버터플라이 부인으로 남길 바랬다. 그녀 자신에게는 '성장'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수였다.



25.jpg
 

초초상은 핑커톤을 자신의 삶을 구해줄 구원자로 여겼던 것 같다. 가난한 삶에서 달콤한 말을 하는 잘생긴 외국인은 핑커톤이 '동양의 어린 아내' 그랬던 것처럼 특별한 판타지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이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도 핑커톤을 보호자 역할로 두기 쉬웠다. 그녀는 극 중 계속해서 미국에서 자유롭게 살게될 것이라고 믿었고, 3년간 핑커톤을 기다릴때 조차도 그가 부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안정되고 행복한 가정에 대한 환상이, 핑커톤이 빌린 집을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삼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초초상의 극단적인 사랑은 그녀 안에서의 요구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초초상이 모든 삶의 열정을 핑커톤이라는 존재에 투영했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더 절실히 느꼈다. 그녀의 자살은 다분히 복수의 의미를 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복수의 의미는 깊숙한 무의식의 작용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자살에는 다양한 맥락이 존재한다. 핑커톤의 미국인 부인을 원망하지 않고 어린 아들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대사나, 명예롭게 죽은 아버지의 모델링을 암시하는 자살 방법이 그렇다. 하지만 오페라 내내 핑커톤의 사랑을 부르짖고 기다렸던 초초상이 갑작스럽게 이런 이유만으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굳이 핑커톤을 따로 불러 자신의 시체를 확인하도록한 방법은 다분히 수동적인 공격성을 암시한다.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명분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 홀로 그 시체를 확인하게 한 행위에는 케이트를 축복하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분노가 느껴진다. 어린 초초상에게 핑커톤은 믿을 수 있는 보호자이자 그 나잇대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애인상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보지 못한 남자를 매매혼으로 만나 어떻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핑커톤의 배신은 그녀가 삶에 가지고 있던 모든 열정의 배신이었다. 그녀가 극 내내 자기도 모르게 되내였던 불안의 현실화이자, 삶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희망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래서 오페라 <나비부인>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사랑을 가슴에 품고 행동하는 초초상을 만날 수 있는 오페라 였다. 혼란스러운 청소년기의 감정과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초초상의 행동력이 한 몫하긴 했지만, 비극적인 결말의 드라마를 만든 사랑의 극단성은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푸치니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성장 대신 복수를 선택한 초초상이 이해가 가는 이유는 대체 뭘까.



포스터.jpg

 
KakaoTalk_20180723_235535454_(1).jpg
 

[손진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