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래 걸려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 영화 "하나레이 베이"

글 입력 2019.06.0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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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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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해야겠다. 속이 답답하면 참을 수 없다. 참을 수 있고, 참아볼 만하다고, 그게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끝에서야 알게 된다. 내가 또다시 바보 같은 일을 벌였고 이 모든 게 내가 참아내기엔 버거운 것이었다고.

영화 <하나레이 베이>를 보고 왔다고 했을 때 친구는 어떤 영화냐고 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영화화한 걸 알고 있어서 하루키 치고는 덜 19금스러운 대사가 있는 편이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답했다. 차분하다 못해 조용한 영화였다. 후반부에 감정이 휘몰아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속이 속이었겠냐마는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 안에 동굴이 생겨버렸을 것이다. 우아한 모습으로 책을 읽는 사치의 동굴에는 더 큰 파도가 쳤을 것이다. 그 요동은 틀어놓은 수돗물 사이로 깊게 쉬는 한숨과 바짝 힘이 들어간 팔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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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가 아들 타카시를 좋아하기만 하지 않아서 좋았다. 불행 배틀은 아니고 불행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툭툭 뼈 때리는 말도 잘하고, 영어 발음도 좋다. 피아노 바를 운영하고 있고, 10년째 하와이에 오는 것 보니 나름 넉넉한 것도 같다. 나이가 들어도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그런 그녀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마약중독자인 남편을 만나 아들이 생겼다. 남편은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우다가 어느 날 죽었고 아들은 갑자기 서핑을 하러 갔다가 상어에게 한 쪽 다리를 뜯겨 죽었다. 그녀가 나보다 불행하다. 그녀와의 불행 배틀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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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흔들릴 줄 알고 있었다. 섬에서 아들 나이와 비슷한 일본 청년 두 명을 만났을 때, 자기 대신 싸워준 아이들에게 샌드위치를 건넬 때, 못 이기는 척 보드를 타게 되었을 때, 결정적으로는 외다리 서퍼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가 흔들릴 줄 알았던 건 나도 흔들려 봤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아픔을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단계가 있어서라는 지식 때문은 아니었다. 나도 그 시간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한 달씩 처박혀 있었고 괜찮은 척해서 괜찮은 듯 건가 싶게 지냈던 기억이 스쳐갔다.

사치가 보여준 반응은 나와 비슷했다. 어느 누구와도 비슷할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덤덤한 척하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섬에 눌러앉아 일주일을 아무 말 없이 보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의 물건을 상자에 다 집어넣어 버렸다. 그렇게 봉해두면 아프지 않을 거라는 듯이 빠르게 꽁꽁 싸맸다. 어차피 다시 열 상자를 뭣하러 그렇게 빨리 잡아넣었나 싶었다. 고작 오른쪽 다리가 없는 외다리 서퍼를 보았다는 말 한마디에 바다를 휘젓고 다니게 될 거면서. 말이 안 될 줄 알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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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아들을 잊지 못하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건 10년 동안 꾸준히 여기를 왔고 그동안 활짝 웃은 적이 없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흔들리길 바라고 있었다. 흔들려서 이 평온함이 다 뒤집혔으면 했다. 소리 내어 울지조차 않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흔들리지 않으면 그녀는 계속 이 평온한 섬의 변두리에 앉아 있었을 테고 평온한 척 또 다른 10년을 보냈을 것이다.

진리를 찾아 헤매 듯 온 모래사장을 뙤약볕에 며칠을 서성거리다 죄 없는 나무에 있지도 않은 힘자랑을 하다가, 결국은 온 집안 물건을 다 집어던지는 그녀를 보고(가끔 나는 저걸 다 던지면 다시 정리하기가 싫어서 던지지는 말자고 다짐하곤 한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자,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손도장 개봉의 시간이야.

이 손도장이 제법 영화에서 웃음을 준다. 남의 아들의 손도장을 찍으라 마라, 안 가져간다는데 10년 내내 손도장을 가져가라고 하는 카우아이 섬 오지랖은 한국에서나 보던 오진 오지랖이라 피식 웃게 된다. 게다가 예감이라도 했는지 문을 열자마자 무슨 일이 있냐는 대사는 얼마나 이질적인지! 당장 아들을 잃은 사람 앞에 자연은 인간과 다르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니 자연을 원망하지 말라는 둥, 손도장도 있으면 좋고, 자연이 잘못한 건 아니니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아들 잃어보지 않고서 말을 하덜 말라 그래 싶었다.

그 말을 하는 남자와 여자가 부부라서 참 잘 맞는다는 생각도 했다. 피하지 말고 슬픔을 마주하고, 증오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맞는 말이 어찌나 잔인하게 들리던지. 카우아이 섬 중에 두 내우가 제일 착하다. 착하고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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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보는 게 아닌가 싶은 서핑 장면이나 구도, 툭툭 끊기는 장면전환이나 또 갑자기 툭툭 시작되는 전개가 성글게 잘라낸 칼국수 면처럼 이어졌다. 딱히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고 반전이 있지도 않아서 편하게 보기 좋았다. 영화를 보기 전 머리가 좀 피로하고 복잡했는데 단순하게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한결 맑아져 있었다. 투박한 툭툭 끊어가기는 소설이 그랬겠지 싶고, 영화가 소설 같은 느낌을 의도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보채거나 판단하지 않고 보게 됐다. 10년이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바보같이 바다를 맴도는 사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리는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오래 걸린다고 뭐라 하는 전직 미국 군인도 있으셨지만, 어차피 우리에게 그런 문제가 하나쯤은 있지 않나. 다른 사람에겐 왜 넘어가지 못하냐는 말은 결국 자신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겐 그런 말을 할 줄 알면서 왜 나는 넘어가지 못하는지 싶지 않겠나.

그녀가 한 번쯤은 외다리 서퍼를 만날 수 있었으면 했다. 화면에 그가 나타났을 때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찾던 사람이 저기 있다고. 하지만 표정을 보면 다 알 수 있지 않나. 터널을 빠져나온 이들의 표정이 어떤지. 막상 나는 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이윽고 만난 또 다른 문제를 볼 충분한 시간을 주자. 한적한 하와이의 섬 대신, 미세먼지와 후끈거리는 열기가 가득한 한국의 골목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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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칵 영화의 초반 흘러나온 흥겨운 노래가 끝에서는 신기한 노래가 된다. 이기 팝의 <The Passenger> 노래를 듣던 아들, 그보다 먼저 듣던 마약중독 아버지, 그 둘을 잃고 나서야 노래를 듣게 된 어머니. 어떤 심경이었을까. 아들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헤매다가 그 노래를 듣게 되었고 어머니는 아들과 남편의 빈자리를 헤매다가 결국 같은 노래에 안착하게 된 것일까.

매 순간 사랑하지 않았고 미움이 켜켜이 스며 있어도 떠난 후에 그립고 아픈 것과 같은 이유인가. 아무리 미워도 죽었음 하는 마음보다 좀 더 미워할 수 있게 내 옆에 머물렀음 싶은 것 같은 이유인가. 그게 노래가 말하듯 계속 달리고 달리며 하늘과 별을, 밤과 도시를 보며 우리가 찾아야 할 우리의 것인가.





* 그 와중에 아직도 안 자봤냐며 뼈를 때리는 사치의 농담이 제일 하루키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 젊은 친구 기를 죽이고 그래요! 영어를 할 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 보면 사치가 말하지 않은 마음을 얻는 법을 이미 잘 아는 친구 같은걸.


I am a passenger
And I ride and I ride
I ride through the city's backside
I see the stars come out of the sky
Yeah, they're bright in a hollow sky
You know it looks so good tonight
I am a passenger
I stay under glass
I look through my window so bright
I see the stars come out tonight
I see the bright and hollow sky
Over the city's ripped-back sky
And everything looks good tonight
Singin' la-la-la-la-la-la-la-la
La-la-la-la-la-la-la-la
La-la-la-la-la-la-la-la, la-la
Get into the car
We'll be the passenger
We'll ride through the city tonight
See the city's ripped backsides
We'll see the bright and hollow sky
We'll see the stars that shine so bright
The sky was made for us tonight
Oh, the passenger
How-how he rides
Oh, the passenger
He rides and he rides
He looks through his window
What does he see?
He sees the silent hollow sky
He see the stars come out tonight
He sees the city's ripped backsides
He sees the winding ocean drive
And everything was made for you and me
All of it was made for you and me
'Cause it just belongs to you and me
So let's take a ride and see what's mine
Singin' la-la-la-la-la-la-la-la
La-la-la-la-la-la-la-la
La-la-la-la-la-la-la-la, la-la

Oh, the passenger
He rides and he rides
He sees things from under glass
He looks through his window side
He sees the things he knows are his
He sees the bright and hollow sky
He sees the city asleep at night
He sees the stars are out tonight
And all of it is yours and mine
And all of it is yours and mine
Oh, let's ride and ride and ride and ride
Singin' la-la-la-la-la-la-la-la
La-la-la-la-la-la-la-la
La-la-la-la-la-la-la-la, la-la

- Iggy Pop <The Passenger>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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