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트레이시 에민, 상처를 애도하는 예술가 ②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6.0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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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에민이 예술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는 것은, 그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이어진다.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한 트라우마의 반복성을 떠올리게 한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유사한 경험을 반복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특히 예술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에민 역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슬픔을 고백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았다.



에민의 드로잉, 뚝 끊어질 듯한 그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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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의 일주일에서>, 1995


<지옥의 일주일에서>는 에민이 낙태 후 침대에 링거를 맞은 채 누워 있는 모습이다. 다리가 뒤로 벌려진채 누워있는 에민의 모습은, 그가 수술을 받을 당시의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내게 닥쳤나 하는 자괴감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꿈꾸기 위해 수술대 위에 올라가는 모습, 그 사이에 어떠한 안정적인 심리상태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보인다.


<넌 날 완전히 벌겨 벗은 채로 남겨두고 사라졌지>는 그가 13살에 마게이트의 골목에서 성폭행을 당한 사건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 에민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포기하지 못했다. 가해자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항의가 그것이다. 그의 상반신과 팔이 위로 올려져 있다는 건 누군가를 붙잡기 위함이리라. 이와 같이 가느다란 선으로 툭 끊어질 듯한 연약한 모임새를 하는 이 드로잉은,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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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날 완전히 벌겨 벗은 채로 남겨두고 사라졌지>, 1994


이러한 드로잉 작업은 그 동안 트레이시 에민이 겪었던 온갖 불행한 일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삶이 그러했고, 그가 했던 작품들이 그러했으니 관객들은 당연히 그의 사적인 삶을 두고 작품을 해석했다. 분명 에민은 작품을 만들고 관객들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치유를 받은 듯 했지만, 자신의 작업이 고통과만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은 또 싫어했다. 작품을 만드는 모두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삶과 작품이 일관적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의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은, 작가가 기계적인 재현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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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생각들은 없어>, 1998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작업에 담긴 온갖 복합적인 심정은 꼭 공포와 아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명확한 생각들은 없어>라는 작품이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성기에 갖다 대었는데, 이는 피해 직후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인지 자위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모호하게 읽혀지는 그림들을 통해 자신 또한 '성'에 관한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밝힌 셈이다.


하지만 그가 판에 박힌 해석을 거부한다는 것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가 성에 대해 모순적인 생각은 당연히 가질 수 있으나, 이 또한 고통의 연장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점점 에민이 작품을 통해 치유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작품에선 어떤 전복적인 성격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이후에 나온 작품들은, 오히려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지속적으로 환기함으로써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 다른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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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모든 것을 가졌어>, 2001



그럼에도 에민은 당당해 보였다. 자유로운 성생활, 밝히기 어려운 과거,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불안한 심리상태에 이르기까지 에민은 솔직하게 자신을 세상 앞에 턱 놓았으니 말이다. 이로 인기를 얻었고 꾸준한 작품활동을 이어갔지만, 앞서 말했듯 그의 내적인 성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치유의 과정이 지나치게 긴 것일까, 훌훌 털어버리지 못할 고통이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거대한 인기와 달리 나약한 자신을 감추고 싶었던 그의 모습이 작품으로 드러난 것은, 아마 <난 모든 것을 가졌어>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녀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이용하에 부와 명예를 얻었다는 자신을 향한 비판적 여론을 조롱하듯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낸 작품이다. 그녀는 가슴이 훤히 드러나고, 팬티마저 보이는 짧은 옷을 입은 채 돈을 자신 쪽으로 쓸어담고 있다.


이는 또 한 번 그가 여태까지 했던 작품이 과연 무엇이었나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분명 상처를 애도하고 싶어 작품을 했을 터이다. 하지만 억압받은 여성의 신체를 구현하던 그 이미지는 역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을 옭아매는 처지에 이르렀다. 대중적으로 얻어 낸 이미지가 과연 자신인지, 대중이 원하기에 나 또한 반복적인 가면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르는 지경에 왔다. 꾸준한 표출은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갈 줄 알았더니, 오히려 고통의 반복과 유명세에 짓눌려 안정적인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따라서 사진 속 그녀는 돈을 시원하게 쓸어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또 하나의 삶에 무게에 짓눌려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는 사람처럼 보인다. 무엇이 자신의 삶을 이렇게 결정적으로 만든 것인지, 끝없는 모순적인 감정을 갖는 에민의 모습은 조금 애처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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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iss Was Beautiful>, 2016



에민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과연 그녀에게 '사랑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사랑이 그녀를 감싸안아 줄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비슷하다. 다행히 최근 그녀의 작품을 보면, 그가 안정적인 상태에 이른 듯 하다. 그 계기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그건 작품활동 보단 '사람'일테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치유하라는 말이 진부하지만 사실 그렇다. 마음의 벽을 치고, 작품 하나만을 바라보며 산 삶은 그녀에게 그닥 행복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꼭 온전히 치유받지 않아도 된다.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작품은 충분히 멋지다. 그녀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길 빈다.



[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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