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시 쓸 때까지] 06. 가장 존경하는 겁쟁이를 위한 기도

글 입력 2019.06.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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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다시 쓸 때까지]

06. 가장 존경하는 겁쟁이를 위한 기도


글. 김해서



나의 '오바 요조'. 가장 존경하는 겁쟁이. 동생 태서에게.

빌어먹을 너를 위해, 나는 무교인데도 자꾸 신앙적인 사람이 돼. 우린 같은 뜻의 이름을 가졌지. 해서와 태서. 큰 바다 그리고 큰 산. 우리의 부모는 사는 동안 우리가 비슷한 행복과 불행을 견뎌내길 원하셨나 봐. 우리가 형제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어. 내가 남자였다면, 혹은 네가 여자였다면 정말 같았을 수도 있겠어. 그러나 남매. 남매라니. 네가 겪는 슬픔과 나의 고통, 네가 겪을 기쁨과 나의 희망은 절대 같을 수가 없지. 이제 서로를 시기 질투하는 건 관두자.

내 최초의 기억이 뭔지 아니. 너의 발을 만진 날이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이 붉고 쭈글쭈글할 때 그걸 검지로 쓰윽 쓸어 보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랐지. 벌겋고 쭈글거리는데, 심지어 움직이다니. 니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 놀란 나를 보고 간호사 이모가 웃음을 터뜨렸어. 그 촉감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 간지러운 검지. 너무 어려서, 네가 날 ‘누나’라고 부를 때까지 난 너가 ‘태서’인지도 몰랐어.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나 서로를 미워하고 동경하는 사이가 될지도 그땐 몰랐지.

존경해. 너는 사실, 질투조차 품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재능을 가졌어. 내가 겨우 시 하나를 짓고 노곤해지는 동안 너의 우주적인 세계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은하를 만들지. 언젠가 죽으면 그 세상으로 떠날 것 같다던 말. 지금도 기억하고 있단다. 경이로워서 잊을 수가 없는 말이었어. 넌 네 세계의 신이자, 캐릭터들 사이를 쏘다니는 은밀한 시민이지. 난 내 시의 주인조차 될 수 없는 운명인데. 시는 나를 모르거든.

만들어졌다 생각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라서, 사실 나도 그 얼굴을 잘 몰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낳는 여자지. 오직 낳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그러나 너는 끝내 네가 가질 수 있는 말들을 찾아 생을 이어갈 거야. 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나는 만들면 만들수록 말을 잃겠지만. 그러니 이 몸을 견제하지 말렴. 넌 너의 길을 가면 돼.

수년간 병을 앓으며 사람을 두려워하며, 네가 울고 웃으며 해준 이야기들. 지금에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거기에 허풍과 엄살이 다소 깊게 있었을진 몰라도 진실했다고 봐. 그러니 용감하게 걸어 나와도 돼. 두렵다는 이유로 네가 믿는 진실을 마주할 기회를 놓치지 마. 내 시를 걸고 너의 신, 하나님에게 말해 둘게. 넌 겁쟁이지만, 용감한 겁쟁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고 말이야. 무모하게 사랑만 많아서, 질투도 많고 순수를 꿈꾸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지. 겁쟁이인 주제에, 괘씸하게도 마음이 뜨겁지.

유월, 시 쓰기 참 좋은 계절이야. 한동안 쓰지 않고 있다만 점점 그리워져. 시를 좀 미워하고 있거든. 벽을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래. 네가 날 자주 미워했던 것과 비슷한 마음이겠지. 나도 네가 날 미워해서 네가 미웠어. 이젠 그저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구나. 장마가 오기 전까지,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겨울이 되기 전까지, 다음 해로 넘어가기 전까지. 언제까지든.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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