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든 나비부인들을 위하여 - 오페라 나비부인

글 입력 2019.06.08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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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은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오페라와 비교해 본다면 아마 지금까지 내가 본 공연 가운데 가장 비극적이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기존에 봤던 오페라 중 비극적 결말 중 하나였던 <카르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비극이었다면 이번 <나비부인>은 본인 스스로 죽음을 선택 함으로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카르멘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반대로 나비부인은 아무도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더 비극적이고 슬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비부인이라는 오페라를 직접 관람하기 전 이야기와 직접 보았을 때 이야기는 약간 달랐다. 줄거리로만 보았을 땐 순진하고 순수한 나비부인을 이용한 핑커톤이 결국 나비부인을 극적으로 몰아 자결하게 만든 것으로 보았는데 오페라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과연 나비부인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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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비부인의 나이는 15세, 무척이나 어린 나이다. 지금 우리나라로 따지고 본다 하면 중학생이다. 중학생이라고 하니 얼마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막에서 나비부인의 나이를 듣고 핑커톤과 샤플레스가 굉장히 놀라 하는 것을 통해 당시 시대에서도 15세의 나이는 어린 나이였음을 눈치챌 수 있다.

15세 어린 소녀는 몰락한 집안의 딸이다. 아버지는 천황의 명에 따라 천황이 직접 하사한 칼로 할복을 했다. 명예롭게 살지 못할 바에는 명예롭게 죽는 것을 택했던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아버지가 명예를 위해 죽었음을 알던 어린 소녀에게는 아버지의 기억이 크게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본다.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몰락해버린 자신의 집안에서 어린 나비부인이 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노래와 춤을 추는 게이샤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본다고 해도 게이샤라는 직업은 예능만 하는 일은 아니었다. 춤과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게이샤와 그것을 구실로 몸을 파는 게이샤로 나누어져 있었다. 어린 나이에 나비부인은 그런 게이샤라는 직업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환멸을 느꼈을 것으로 본다. 부유하게 살아왔던 나비부인에게 있어서 게이샤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게이샤로 다시 돌아갈 바에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게이샤라는 직업으로 돌아가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이 있었다는 것을 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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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나비부인에게 찾아온 하나의 희망. 바로 외국인 남편, 핑커톤과의 결혼이다.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버린 나비부인은 불교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남편의 종교로 개종하면서까지 핑커톤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결국 승려였던 삼촌에게 개종한 것을 들키고 집안에서 버림을 받게 된다.

괴로워하는 나비 부인을 달래며 핑커톤을 위로해주는데 필자는 이 장면에서 나비부인이 어렴풋이 자신의 비극을 눈치채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핑커톤에게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나비부인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추측했다.

아름다운 둘의 이중창 속에 나비부인은 핑커톤의 진심을 계속해서 질문하고 물어보고 확인하고 하는 장면이 반복되고 핑커톤을 그런 나비부인의 마음을 아는지 달콤한 거짓말로 달래며 결국 둘은 이루어진 후 1막이 마무리된다. 아무래도 집안에서까지 버림받게 되는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 핑커톤에게 유일한 희망을 걸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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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되는 2막에서는 행복했던 한 달의 시간 끝나고 핑커톤이 다시 미국으로 떠난 후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지만 그는 연락 한 통이 없었고 나비부인은 그저 그를 애타게 기다린다.

하녀인 스즈키는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남편이 돌아온 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단념을 하라고 말하지만 나비부인은 그런 스즈키의 뺨을 때리면서 극구 부인한다. 이 장면에서 아마 나비부인 본인도 알았을 것이다. 스즈키의 말이 맞는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본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3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15세 나이 그대로 멈춰있다고 보였다.

일본은 버림받은 아내는 이혼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법이 있었다. 그 법을 이용해 부인을 수십 번 갈아치운 야마도리와 다시 재혼을 하라는 재촉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샤플레스는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지만 나비부인은 샤플레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결국 샤플레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진실을 알려주지 못한 채 자신과 핑커톤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보여주며 핑커톤에게 아이의 존재를 알려달라 부탁하며 남편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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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때 항구에 핑커톤이 탄 군함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비부인은 감격하며 핑커톤이 자신을 위해 돌아온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핑커톤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온 것이었고 나비부인은 이를 알아차린다. 나비부인의 입장에서 자식은 핑커톤과 자신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비부인의 희망마저 핑커톤이 가져가버리면 나비부인에게 남는 건 하나도 없다. 핑커톤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나비부인은 자신은 그럼 다시 게이샤로 살면서 아이와 자신에게 동정을 베풀어 달라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냐며 그런 삶을 싫다고 표현하던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통해 핑커톤이 없더라도 자신의 아이는 자신과 함께 미래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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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극 중에서 아이의 아빠가 곁에 없이 태어난 자식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고 나비부인의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자신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좋은 곳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는 것이 훨씬 더 아이를 위해 좋은 일이라는 건 부모로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단념하고 대신 30분 후에 핑커톤이 직접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말을 하고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를 두고 나비부인은 아버지의 유품인 칼로 자결을 하면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유품은 명예롭게 살지 못할 바에 명예롭게 죽는 걸 택할 때 쓰던 검이다. 아버지가 죽은 검으로 본인 또한 아버지처럼 따라 죽었음을 통해서 나비부인에게 아버지의 기억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또 한 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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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은 당시 자포니즘이 깊게 물들어 있는 상황에서 동양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신비롭고 새로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성에 대한 로망이나 새로움이 이런 나비부인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당시에 대중적으로 나온 것을 통해서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나비부인들이 존재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참하고 괴롭게 살아가는 그때의 그 여인들. 그녀들 또한 나비부인과 마찬가지로 괴로움과 배신과 고통 속에서 살아와야 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 오페라를 통해 그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나비부인들을 위로해본다.


[박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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