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상 가족 말고 조립식 가족, 남편 말고 동거인 –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도서]

글 입력 2019.06.0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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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결혼한 삶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생 시절 나중에 커서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늘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고, 그 이유는 한결같았다.


“아무하고도 침대와 화장실을 같이 쓰고 싶지 않아, 절대!”


수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결혼할 생각이 없고 아무하고도 침대와 화장실을 같이 쓰고 싶지 않지만, 난생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된 후로 나는 나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되었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외롭지만 결혼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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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살고 있다. 혼자 지내다 보면 내가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도 침묵을 깨지 않는다는 사실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여태껏 스스로를 ‘사람을 좋아하긴 해도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정말로 혼자 있을 시간이 주어지니 오히려 외로움을 견디느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외로움을 타고 적막을 못 견뎌하고 사람의 인기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자취를 시작하고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상상했던 독신으로 사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혼자 삼개월을 지내는 동안에도 일주일을 못 버티고 친구를 불러내는 내가 과연 10년, 20년, 그리고 30년이 넘는 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을까? 몇 달 동안 지켜 본 내 모습을 토대로 답하자면 나는 절대로 평생 혼자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혼을 해야할까? 아니, 그래도 결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다. 내 선택지는 어떻게든 적응하며 평생을 혼자 살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틀어서 비혼주의를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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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자 사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간 그려온 미래의 그림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2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라는 질문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다정한 배우자와 꾸린 행복한 가정을 답하는 주변인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단번에 대답할 수 있는 그 확신이 부러웠다.


내가 앞으로 맞을 미래는 지금과 같은 비자발적 독신 상태를 10년이고 20년이고 연장해가면서 살아가는 모습일까? 40대 비혼 여성들은 정말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내 미래에 펼쳐진 이 막연하고 끝 없는 공백에 다시 그림을 그려나갈 연필을 쥐여주고 로망을 선물해준 책이 바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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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계절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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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놀라웠던 부분은 김하나 작가와 황선우 작가 두 사람이 보내는 일상이 나랑 내 친구들이 보내는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두 작가는 기분에 따라 술을 마시고 사소한 일을 벌이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배가 찢어져라 웃었다가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다투고 화해한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읽는 것이 공감 가고 즐거우면서도 내가 상상했던 40대의 삶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낯설었다.


내가 아는 40대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친구들, 그리고 친척들뿐이다. 그래서 내가 막연히 상상한 40대의 삶은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가을을 앞둔 늦여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책에 나오는 40대의 삶은 활기 넘치고 생동감 있는 하루하루로 이루어진 일상이었고 내가 보내는 좌충우돌한 일상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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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40대가 되면 세상 어지간한 것은 다 경험해봐서 여유가 생긴 ‘안정적인’ 불혹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미래의 나는 어찌 됐든 삶이 쌓인 만큼 성장했을 것이고, 내가 지금 서툴고 잘 모르는 그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를 웃게 만드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삭막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 보여주는 40대는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새롭게 배우는 것이 있고, 어딘가 두렵고 서툰 부분이 있고, 나뭇잎만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거워지는 순간이 있는 그냥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친구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 곳을 마련하고 내 공간을 내 취향으로 채우고 여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짜 어른의 즐거움’처럼 느껴져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나이도 어리고 경제 능력도 없는 학생인 내가 학교 근처가 아닌 원하는 위치에 부모님의 도움 없이 거처를 구하고, 1년 뒤에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원하는 가구를 들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로망’이기 때문이다.


물론 2년이 넘도록 같이 살면서 서로에게 기대를 버리기보다 계속해서 기회를 주며 관계의 온도를 맞춰가는 천생연분을 만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음,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판타지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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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속의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은 내 삶에서 텅 비어 있던 ‘40대 이후’의 빈칸에 새로운 그림과 상상과 로망을 빼곡하게 채워 넣어주었다. 결혼, 남편, 아이 없이 잠 자고 눈 뜨고 밥 먹는 40대의 일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실로 어마어마한 변화이다.


혼자 아니면 결혼, 두 가지 선택지만 던져주고 ‘외로움을 견디든지 결혼이라는 ‘현실’을 견디든지 네가 알아서 골라! 근데 예시는 결혼만 보여줄 거야.’ 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인생을 그려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족 말고 다른 가족은 안되나요?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마음이 잘 맞는 남자가 생기면 결혼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대사는 내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늘상 하던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굳이 내 발로 걸어 들어가진 않겠지만, 내가 찾아 헤매던 ‘유니콘’을 발견한다면 홀라당 넘어 갈 수도 있을 듯?’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유니콘을 발견할 일은 없을 테니 그냥 기대를 버리고 혼자 살 각오를 하겠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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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가족이라는 게 꼭 로맨틱한 사랑과 헌신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정말 아무도 나에게 해준 적 없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니, 가족을 ‘조립’해서 만든다니, 이케아 가구도 아니고 가족이 무슨 장난이야? 두 사람의 사랑도 사랑이지만 남녀가 평생을 약속하며 두 가족이 서로 결합하는 것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구. 가족이 된다는 건 그래서 이렇게나 무겁고 중요한 결정인 거야. 여전히 내 안의 가족 신화는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이라는 단단한 구속으로 서로를 묶는 결정을 내리는 건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생애 주기에서 어떤 시절에 서로를 보살피며 의지가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따뜻한 일 아닌가. 개인이 서로에게 기꺼이 그런 복지가 되려 한다면, 법과 제도가 거들어주어야 마땅하다. 이전과 다른 모습의 다채로운 가족들이 더 튼튼하고 건강해질 때, 그 집합체인 사회에도 행복의 총합이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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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한 사람이 가장 친밀한 공간에서 서로를 아끼고 보살필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가족의 탄생이 아닐까? ‘정상 가족’이라는 무겁고 단단한 것이 아닌 유연하고 다채로운 조합도 충분히 가족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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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이라는 앨범에 새로 끼워 넣은 스냅 사진 한 장이다. 내 꿈은 나중에 마흔이 되어서 이 앨범에 그 때 만난 내 가족의 스냅 사진을 추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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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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