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사는 사람들] 50년 전, 미술사에 전설로 남은 전시를 만든 인물

#9 하랄트 제만과 '태도가 형식이 될 때'展
글 입력 2019.06.1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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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부터 이탈리아 베니스는 예술적 활기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2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대규모 국제 미술전시인 베니스 비엔날레가 개막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1일 개막해 11월 24일까지 열리는 제58회 비엔날레는 전세계에서 열리는 수많은 비엔날레 중에서도 명실 공히 크고 중요한 비엔날레로서 올해도 그 입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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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Chae

 


비엔날레는 예술품을 판매하기 위함이 주목적인 아트 페어와는 엄연히 다른 성격의 전시로,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미술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나아가 현재 지구 곳곳의 아티스트들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떤지 공부하기에 비엔날레는 최적의 장소다. 그만큼 하나의 비엔날레의 방향을 조직하고 구성하는 총 감독, 큐레이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미술을 사는 사람들> 시리즈에서 미술 시장과 관련한 컬렉터, 갤러리스트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았는데, 이번 편에서는 비엔날레 기간을 맞아 미술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둥인 큐레이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큐레이터란 박물관, 미술관에서 자료를 수집, 연구하여 전시를 기획하는 전시 기획자를 가리킨다. 작품이 어떤 맥락에서 전시되느냐에 따라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면서 큐레이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졌고, 심지어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다는 의미에서 때로 아티스트로까지 인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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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ald Szeeman ⓒTheGettyResearchInstitute

 


이러한 큐레이터의 입지를 한층 끌어올린 인물은 이번에 소개할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1933~2005)으로, 스위스 출신의 전설적인 큐레이터이자 ‘독립 큐레이터’의 시초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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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zeeman as a student, portrayed by Kurt Blum, Bern, 1956. ⓒswissinfo.ch

 


하랄트 제만은 마치 무언가를 기획하고 설계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다방면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미술사, 고고학,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1957년까지는 “총체예술을 실현하려는 야망을 담은” 1인 스타일 연극에 열중하기도 했다. 19살 때 화가가 되고 싶었다던 그는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의 전시를 보고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예술에 대한 연구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가, 당시 스위스 베른 쿤스트할레 미술관의 관장으로 있었던 프란츠 마이어(Franz Meyer)와의 인연으로 서서히 전시 기획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961년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베른 쿤스트할레의 디렉터로 임명된 그는 완성도 있는 전시로 미술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능력 있는 큐레이터에서 ‘전복적인’ 큐레이터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69년에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 전시가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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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관객과 통화한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 ⓒswissinf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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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밖의 보도블럭을 깬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 ⓒswissinfo.ch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전시는 스위스의 조용한 도시 베른에 충격을 안겼다. 참여 작가 리차드 세라는 납덩어리를 녹여 전시장 로비에 붓고, 요셉 보이스는 기름 덩어리를 바닥에 바르고, 월터 드 마리아는 전시장에 전화를 설치해 관객과 통화하고, 마이클 하이저는 전시장 밖의 보도블럭을 깨고, 심지어 전시에 초대받지도 않은 다니엘 뷔렌은 줄무늬 포스터를 전시장 주변에 도배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아이디어만을 가지고 온 아티스트들에 의해 관객들의 눈앞에서 실현되거나 심지어는 파괴되었던 이 파격적인 전시는 하랄트 제만의 말을 빌리자면 “구조화된 혼돈(structured chaos)”이었고 하나의 “이벤트”였다. 시민들과 미술 관계자들의 거센 항의와 비난을 겪은 이 전시는 제만을 쿤스트할레 디렉터직에서 사임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미술계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전설적인 전시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다시 돌아보는 <태도가 형식이 될 때>


 

하랄트 제만은 어떻게 이런 전시를 기획할 수 있었을까? 잘 알려진 사실 중 하나는 1967년 제만이 독일의 전위적인 설치 미술가, 행위 예술가였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를 만난 것이 그의 큐레이팅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 보이스는 현대인의 눈으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만큼 굉장히 흥미로운 예술가다.


그의 작품에서는 더 이상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완성도가 중요하지 않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나 사상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 과정 자체가 바로 그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예술의 형태는 보이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반문화, 반체제의 태도를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공유하고 있었고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만은 이를 하나의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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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Beuys, Planting the first tree; 7000 Oaks, Documenta VII, Kassel, 1982. ⓒPHAI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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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트천으로 몸을 감싸고 3일간 야생동물 코요테와 함께 지낸 요셉 보이스의 퍼포먼스 '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1974)

 


“우리는 네덜란드 화가인 라이니어 루카센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는데 ‘제 조수가 있는데 그의 작품을 보실래요?’라고 그가 말했어요. 그 조수가 바로 얀 디벳이었는데 그는 두 개의 테이블 뒤에서 우리에게 인사했죠. 한 테이블은 표면에서 네온 광선이 비쳐 나오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은 풀로 덮여 있었는데 거기에 그는 물을 주고 있었죠. 나는 이러한 제스처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좋아, 내가 뭘 할지 이제 알겠어, 내가 방금 봤던 것과 같은 행동들과 제스처들에 포커스를 맞춘 전시를 하는 거야.’라고 에디에게 말했어요.”


-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과정에 대해 말하는 하랄트 제만.


 

또한 그가 이러한 생각을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는 바로 담배회사 필립 모리스의 지원이었다. 제만의 전시를 인상 깊게 보았던 필립 모리스 측은 그에게 전시를 열 수 있는 자금과 더불어 전시 기획에 있어 ‘전적인 자유’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늘 자금 마련과 지원사 측의 여러 조건으로 기획에 제약이 있었던 제만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파격적인 지원 덕분에 아이디어로만 끝날 뻔했던 <태도가 형식이 될 때>가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이 전시는 미술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관객은 그저 눈앞에 놓인 작품 앞에 당혹스러워 하며 스스로 그 답을 생각해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수백년 동안 그림 앞에 편안했던 관객을 일순간에 불편하게 만들어버렸지만 동시에 미술의 개념과 역할을 더욱 지적이고 정치적으로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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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랄트 제만은 베른 쿤스트할레를 나와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고 실험적인 전시를 만들었다. 또한 카셀 도쿠멘타와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적인 전시 행사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시기에 총 감독을 역임하며 미술계에 큐레이터로서는 이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술관에 소속되어 주로 작품의 보존과 연구를 진행했던 기존의 큐레이터와는 달리 ‘전시 기획’에 더욱 많은 비중을 두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독립 큐레이터’의 선구자인 것이다.


그는 5년마다 독일에서 열리는 카셀 도쿠멘타의 1972년 총감독을 맡아 이를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미술 행사로 끌어올렸으며, 베니스 비엔날레는 1999년과 2001년 총감독을 연임하며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아페르토(Aperto) 섹션을 처음 만들고, 당시 국제 미술 사회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중국 작가들을 비엔날레에 대거 소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미사사 7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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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AIDON

 


1997년에는 제2회 광주비엔날레의 총감독으로 초청되어 한국에 오기도 했는데, 미술계에서는 먼 나라 한국의 신생 비엔날레의 감독 초청에 응한 것에 의아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처럼 하랄트 제만은 200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다. 이미 주류로 형성되어 있는 것에 편승하기보다 이를 거스르는 ‘전복적 에너지’의 예술을 발굴하고, 수면 위로 올리고자 하는 의지와 파워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미국의 개념미술이든, 중국이나 러시아, 남미의 미술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가 큐레이터로서 가진 과도한 영향력 때문에 오히려 작가의 의도나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제만은 항상 한 발 앞서 현대 미술이 가고 있는, 혹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리더였다는 점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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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0년 전 열렸던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전시는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 베니스의 프라다재단(Fondazione Prada)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1969년의 전시도 2013년의 전시도 모두 놓쳐버려 아쉬운 마음이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에 하랄트 제만과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면 어떤 형태의 새로운 전시가 탄생할 수 있을지 또 다른 설레는 고민과 기대를 안고 있다.

 

 

참고자료

(책)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큐레이팅의 역사>, 미진사, 2013.

평론가 임근준 블로그 - 하랄트 제만 죽다.

서울 아트 가이드 연재칼럼 - '하랄트 제만' 기억에 대하여

전시해설가 김찬용 블로그 - 요셉 보이스를 통한 시대정신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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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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