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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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의 여행기
#3 굿바이 스페인
Opinion 민현
[3] 론다
“누에보 다리만 보고 오면 돼!”
라는 말을 안 믿고 한 도시를 하루 이상 봐야한다는 마음가짐으로 1박하게 된 론다는 세비야에서 한시간 반 정도 들어가면 나오는 조그만 도시다. 안달루시아 고원을 14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정말 탁 트인 고원을 마주했다.
정말 작은 도시 론다에 도착해 나는 무작정 걸었다. 길이 나오지 않는 곳까지. 이렇게 사람이 없는 동네를 걸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한국 사람은 물론 스페인 사람도 없는 곳까지 걸어오니 어딘가 마음이 평안해진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은 집들과 초원을 사진에 담고 나서야 나는 누에보 다리로 향할 수 있었다.
* 여행 스타일
걷다보니 내 여행의 스타일, 색깔이 잡힌 것 같다. 일단 걷는다. 30분 이내라면 걷는다. 그리고 멈춰선 곳, 가다가 들린 곳이 내 여행지가 된다. 처음엔 언제 이곳에 다시 오겠어, 하는 생각으로 7시부터 10시까지 돌아다녔지만 점차 속도를 조절해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렇게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은 한 번 더 온다. 새로운 곳을 여러번 보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곳을 한 번 더 눈에 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곳은 꼭 봐야돼!! 하는 부담감은 덜기로 했다.
2달이라는 긴 여행 기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바쁘게 다니면 스페인의 ‘주요 관광지’는 다 찍고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만한 시간이다. 애초부터 그런 바쁜 여행은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설렁설렁 짰던 여행 계획이 오히려 도착하니 큰 도움이 된 듯 하다. 그래도 첫날부터 4만보를 찍었던 내 걸음은 점차 줄어 이제 2만 중반 대에서 평균치를 이뤘다, 다행히도.
그래도 론다는 역시 누에보 다리였다. 아침에 오고, 오후에 오고, 저녁에도 왔다. 사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하루 모든 모습을 담기에 부족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리고 누에보 다리에서 본 그 평원과 조그만 마을들도 내 마음을 간지럽혔다. 대도시에서 벗어나 관광객이 모두 떠나간 조용한 저녁, 론다에 여유롭게 앉아 세비야에서의 어젯밤을 추억해본다.
[4] 그라나다
나는 나름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한번도 첫 눈에 사랑에 빠진 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라나다는 간접적으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만든 곳이었다. 난 그라나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이전의 세비야가 조금씩 나를 끌어 당겨 편안함을 주는 도시였다면, 그라나다는 짧지만 강렬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서서히 스페인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도시를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점점 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그라나다에 온 단 하나의 이유는 알함브라 궁전 때문이라고 해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알함브라의 이름을 딴 국내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원래 인기가 많은 관광지였는지 정말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궁전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엄청나게 큰 그 궁전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모두 품어줄 만큼 엄청나게 컸다.
아랍의 향을 가득 머금은 그 궁전은, 그동안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내게 다가왔던 아랍과 이슬람의 예술에 대해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해주었다. 어떤 관광지를 들어가도 1시간이면 금방 싫증을 내는 내게 알함브라의 궁전은 3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을 하사했다.
그리고 6월 1일, 축구 팬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현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지 국가에서 관람했다. 축구 따위엔 관심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밤이 되자 수많은 팬들로 돌변했다. 그 분위기를 느끼며 보는 건, 새벽 4시에 혼자 앉아 졸며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되어 먼 섬나라 팀의 우승을 축하했다. 그래서 그런지 온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관광객도, 현지인도 많았던 그라나다의 분위기가 매일 매일 뜨거운 태양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올라선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바라본 그라나다의 야경은 아랫동네의 시끌벅적함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낭만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받은 성벽처럼 빛나는 씨샤 숯덩이의 타오름을 마주한 나는 내 마음에 새로운 불씨를 발견했다. 버려진 성처럼 냄새만 풍기던 마음에 기껏해야 한두 시간 남짓, 아름다운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그 불빛을 마음에 담고 싶어 연기를 한모금씩 들이킬수록 성곽은 더 밝게 빛난다.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의 야경을 보면 누구나 이런 감성 넘치는 글을 쓰게 마련이다. 정말 같이 있는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만한 풍경이었다. 하늘 위를 가득 메운 별들도 빛을 조금 보태며 수천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쁜 야경이라면 놓치지 않는 한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 그 감흥을 살짝 깼다.
내일이면 그라나다를 떠나는 게 아쉽지만, 어린 날의 사랑처럼 아쉬움으로만 남을 것 같다. 그만큼 짧지만 강렬했던 기억으로 그라나다는 내게 남았다.
[5] 코르도바
수채화를 칠하던 옛날 내 물감엔 고동색 옆에 자주 쓰지 않는 어두운 초록색이 있었다. 그래도 꼭 나무의 마지막 어두운 부분을 칠할 때, 그리고 나무 등걸에 조금씩 자라나는 잎사귀들을 칠할 땐 항상 그 색을 찾았다. 자주 찾지 않지만 나름 자기 특색을 가진 그 색이 마음에 들었다.
초록색과 고동색, 그리고 얕은 노란색을 섞은 색으로 빛나는 과달비키르 강을 보고있으니 코르도바의 색은 그 어두운 초록색을 떠올리게 만든다. 관광객들이 자주 찾지 않는 이 도시는 누구나 한번 보면 마음에 들 특색있는 색을 갖고있다.
코르도바는 그렇게 아라비아의 색깔을 처음으로 칠하고,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한 번, 뒤이어 스페인의 색을 덧칠한 아름다운 도시다.
알카사르가 있는 도시는 과거에 대도시였다고 하는데 코르도바는 과거의 그 영광만 간직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따금 찾는 관광객들도 알함브라만 못하다거나, 코르도바는 딱히 볼 것도 없고 재미도 없는 도시라고 말하는 소리를 혼자 묵묵하게 들으면서 조용하게 자리를 지킨다.
사실 코르도바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곳은 내가 있던 호스텔의 테라스다. 혼자 누워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세계 대부분 사람들은 모를 코르도바의 진짜 모습을 안 것 같아서 어딘가 흡족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아침부터 봤던 메스키타와 알카사르, 그리고 과달비키르 강의 야경도 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니, 낮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온 것 같다. 마치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 사실 그렇게 떠나기 아쉬웠다는 생각으로 모두 강가에 서서 그렇게 거리 악사의 연주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6] 마드리드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 나는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향했다. 챙겨온 국제학생증 덕분에 무려 무료로 입장했을 땐 그 고난에 대해 상상도 못했다. 왜 세계 3대인가 했더니 정말 크다. 과장 보태지 않고 하루 종일 이 곳에 있어도 모든 작품을 둘러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벨라스케즈, 고야, 루벤스 등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이 정말 정말 많이 실려있다. 지금까지 갔던 미술관은 독립 전시 쯤으로 만드는 프라도 미술관의 웅장함은 그림을 보면서 드는 감탄과 경외감을 더했다.
그리고 솔 광장, 마요르 광장 등 왜 이렇게 마드리드엔 광장이 많은거야 하고 생각하며 걷다 보면 마드리드 왕궁에 도착한다. 현지인 투어 가이드가 강조하던 1561년, 펠리페2세가 천도한 이후로 마드리드는 그렇게 쭉 스페인의 수도가 되었다.
대도시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지, 걸어다니기에도 벅찼고 이리저리 사람에 치여 다녀 조금 여유가 없는 느낌이 강했다. 조용한 소도시가 그립기도 하고 6일 간의 마드리드는 너무 길기도 해서 세고비아와 톨레도라는 근교 도시를 찾았다.
[7] 세고비아/톨레도
마드리드에서 한 시간 북쪽으로 가면 세고비아가, 그리고 남쪽으로 가면 톨레도라는 작은 도시가 나온다. 마드리드에 여행 온 관광객들이 꼭 한번쯤은 찾는 이 도시는 과거 마드리드를 지탱하는 요새 역할도 했다고 한다. 톨레도는 과거의 수도였고, 아직까지 중세의 그 모습을 간직한다고 하니 현재보다 과거를 사랑하는 나에겐 더없이 좋은 도시였다.
세고비아의 수도교는 도시 중앙에 떡하니 놓여 그 위용을 자랑한다. 어쩐지 사람들은 무심하게 수도교 바로 밑 테라스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즐긴다. 그 모습이 어색하여 나도 놀라지 않은척, 저정도 유적은 익숙한척 해봤지만 솔직히 입은 다물지 못했고, 사진기를 멈추지도 못했다.구름이 좀 걷혔으면 참 좋았을 톨레도의 전경. 우두커니 솟은 성당과 알카사르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다. 성벽으로 둘러싸여 높은 곳에 요새처럼 세워진 이 도시는 아직까지도 옛날 집들과 거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실 이제 성벽, 다리, 성당, 성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처음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처럼 엄청난 감흥은 없다.* 스페인 마무리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한국에 있는 지인들, 가족들이 물어보는 질문들 중 몇가지를 뽑아서 대답해보았다. 여행 20일차를 정리하고 지금 내가 어디쯤 와있는지 정리해보고싶었다.
Q. 여행 첫 발 걸음을 뗐다, 지금 기분이 어떤지?
첫 발걸음이 생각보다 길었다. 아무 것도 찾지 않는 방랑자가 되기로 했지만 여기저기 이것저것 찾고 있는 날 보니 안쓰러운 느낌도 든다. 기분은 왔다갔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처럼 웃어넘길까 싶다.
Q.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는 어디인가?
바르셀로나, 세비야, 론다, 말라가, 그라나다, 코르도바, 마드리드, 세고비아, 톨레도 2주 반 정도 되는 시간동안 나름 여유롭게 돌아다녔는데 왠만한데는 다 다녀온 것 같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는 세비야다. 만났던 사람들, 도시의 풍경, 햇살과 달빛이 비추는 그 강의 풍경까지.. 여행을 끝마칠 즈음, 1주일 정도는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도시에 가서 머무르고싶다. 지금까지는 아마 세비야가 되지 않을까?
Q. 스페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하나하나 다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한 가지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스페인은 내 기대보다 더 나에게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어주었다.
Q. 스페인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mañana.
Q. 어때? 여행 오기 전이랑 지금이랑??
음.. 아직 여행이 많이 남아서 뭐라고 딱 말은 못하겠지만 일단 좋다. ???
Q. 앞으로 남은 여행 목표 혹은 생각이 있다면?
일단 1번은 외국인 친구 만들기. 생각보다 사람들이 무관심하다. 이따금 말을 거는 사람도 있지만 서로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 좀 아쉽다. 내가 먼저 다가가 외국인 친구 만드는 게 목표다, 한국인 친구는 그만 만들고.
두 번째 목표는 지금의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어떤 일에 흔들리거나 마음이 무너지더라도 남은 두달가량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하고싶다. 2주에 한 편씩 쓰는 이 글이 마음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세 번째는 정말 안전하게 귀국하는 것, 여행 중 헝가리 사고 소식을 듣고 정말 안타까웠고 슬펐다. 사실 다른 모든 건 중요하지 않다. 그 소식을 듣고 아무 일 없이 무사히 한국 땅을 밟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민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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