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갑을고시원은 여전히 존재한다 [도서]

갑을고시원 체류기
글 입력 2019.06.1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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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나’의 가족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한 후 뿔뿔이 흩어져 지내게 된다. ‘나’는 친구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얹혀살다 갑을고시원이라는 곳에 들어간다. 갑을고시원은 다리를 제대로 뻗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았고, 방음이 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자그마한 소리조차 민폐가 되는 곳이었기에, ‘나’는 점차 조용한 사람이 되어간다.

‘나’는 이러한 고시원 생활 끝에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또한 사고로 죽은 형이 납골당에 안치되고 사기를 쳤던 삼촌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누구에게나 갑을고시원과 같은 밀실이 존재한다고 여긴다. 이후 ‘나’는 2년 6개월간의 고시원 생활을 끝내고 번듯한 직장과 가족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갑을고시원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기를 바란다.



혼자는 아니지만, 혼자인


“어쩌면 인간은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카스테라, 갑을고시원 체류기 中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주인공 ‘나’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시끄럽다며 으름장을 놓는 ‘김검사’를 보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는 비유하자면 군중 속의 고독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만큼, 많은 사람과 함께할수록 외로움을 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말은 필자로 하여금 그 의미를 고민하게 했다.

‘나’는 왜 갑을고시원에서 외로움을 느꼈을까?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고시원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고시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이들이 타인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다소 장난스럽게 표현됐으나, 갑을고시원에서는 인간의 생리현상인 방귀조차도 뀔 수 없다. 그뿐이겠는가. 고시원의 세계에선 작은 기침소리나 한숨을 낼 수 있는 자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갑을고시원의 사람들은 없는 듯이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렇다면, 갑을고시원의 사람들은 왜 굳이 이런 식으로 살아야 했던 것일까? 필자가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은 없다. 하지만 수많은 고시원을 지나칠 때마다, 이곳은 경쟁에 절박한 이들의 공간이라고 인식하곤 했다. 갑을고시원에서 갑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김검사 또한 사법고시라는 경쟁에서 패배한 자였다. 이처럼 고시원 사람들의 눈앞엔 개개인이 겪은 패배의 설움과 앞으로 펼쳐질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모두 타인과 교류할 여유 따위 없는, 고독한 이들이었다.



누구에게나 밀실은 있다

갑을고시원에는 저마다의 절실함이 담겨있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고시 합격을 위해 피가 터지도록 노력했으며 어떤 이는 살기 위해 아등바등 몸부림쳤다. 즉 갑을고시원은, 제대로 씻지 못하고 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지만 사람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었다.

‘나’는 이 공간을 ‘밀실’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밀실은 남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 비밀의 방이다. 즉, 나만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필자 또한 ‘밀실’이 있었다. 한때 가세가 기울어 세 식구가 쫓겨나다시피 살던 집을 나온 적이 있다.

당시 어머니의 지인이 집을 내어준 덕분에 거리에 나앉지 않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타인의 냄새로 가득했던 그 집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의 밀실이었다. 필자가 ‘한때’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힘들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밀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실이 없었다면 어떤 희망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카스테라, 갑을고시원 체류기 中



‘나’는 갑을고시원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곳이 여전히 존재하기를 소망한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지지 못하면 낙오되는 각박한 세계에서, 나를 유일하게 받아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빛이 반짝이는 수많은 건물 중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지 않은가. 내가 무심코 지나친 어떤 곳이, 누군가에게는 숨통을 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갑을고시원은 여전히 존재할지도 모른다.


[황채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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