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공상의 향연, 그러나 ‘현실적인’ - 에릭요한슨 사진전 [전시]

공상이지만 현실적인.
글 입력 2019.06.19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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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상, 판타지(fantasy)


 

흔히 ‘판타지(fantasy)’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공상’이라는 단어. 사람들은 공상한다고 할 때 저마다 얼마만큼의 상상력을 담아낸다. 완전히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미지를 창조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현실적인 이미지에 약간의 상상력을 녹이기도 하고, 온전히 현실적인 것에 조금의 상상을 덧칠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공상의 특징은 그 정도가 어떻든 간에 무언가 현실에 없을 법한 것을 떠올리거나 구현한다는 것이다.


공상이 빚어낸 대부분의 결과물들은 머릿속에서 순간이라는 형태로 반짝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곤 하는데,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머릿속으로부터 이 결과물들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상에 내놓기도 한다. 사진이나 그림의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분명 내가 어제 밤에 앉아있던, 그렇게 매일 같이 시간을 보내던 책상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음에도 누군가의 사진이나 미술작품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형태가 왜곡되어 있거나, 왜곡의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한 경우가 있다.

 

이렇게 공상의 결과물들을 특정한 형태로 세상에 내놓게 되면 높은 확률로 그것은 일단 “기이한” 것이 된다. 이때 기이하다는 단어가 무조건 부정적인 어감을 갖는 건 아니다. 해당 작품을 보고 놀랍다, 창의적이다, 재미있다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강조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결국 그러한 결과물들은 기이하다는 특징을 일차적으로 갖게 되고, 현실세계에 일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전제에 묶이게 된다. 날개 달린 책상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회화 작품을 통해 공상의 산물이라는 형태로 세상에 나올 수는 있으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물질세계에 존재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가상의 것이다. 날개 달린 책상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정도로, 스스로가 아닌 회화나 사진과 같은 현실의 물질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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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스스로를 다리미질하는(...) 사람이라니.



 

2. 현실적인 초현실을 담아내다


 

에릭 요한슨의 사진전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날개 달린 책상과 다를 바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에릭의 사진은 분명 현실에서 포착할 수 없는 현상이나 풍경을 묘사하고 있었지만 날개 달린 책상을 볼 때처럼 완전히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정도다. 제작 방법이 궁금해서 벽에 적힌 설명을 유심히 봤다. 포토샵을 비롯한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여러 사진을 합성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현실적인 초현실”을 구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감쪽같다는 표현이 아주 잘 어울리는 작품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가로지르는 와중에, 그 도로의 끝부분이 반으로 갈라지며 마치 승천하려는 듯이 높아지는 작품. 마치 원래부터 도로가 그렇게 생겼다는 듯이 태연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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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제의 사진.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은

자신의 최후를 알까.


 

때로는 평온함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초현실의 ‘초(超)’는 무언가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초현실이라는 이름이 붙는 작품들은 대부분 현실을 뛰어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표현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는 미술 작품들은 대놓고 나는 현실세계에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랍니다, 라고 광고를 한다.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정말 멀다. 그러나 에릭의 사진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모든 사물이 제각기의 위치에 놓이거나, 일련의 상황들이 자연스럽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현대사회에서 인류의 기술력이 눈부신 수준으로 발달한 건 사실이지만,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을 바탕으로 삼는 인공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 낼 정도로 발전했다니. 세상 염세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작품을 보며 이런 비슷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오늘날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은, 우리가 전형적으로 떠올리곤 하는 붓이나 이젤 위 캔버스, 수채 물감 등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전시회 내부를 돌아다니는 에릭 씨(?!)를 보며(!!) 물어보고 싶었다. 편집 프로그램을 어떻게 배우면 그렇게 능숙히 다룰 수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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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관람한 친구는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제작 과정을 담은 비디오도 함께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참을 바라보시곤 하더라.



 

3. ‘사진’전인가?


 

작품을 보면서 느낀 점 중 또 하나는 위의 소제목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과연 이 작품들이 사진이라고 불릴 수 있냐는 것이었다. 같이 전시회를 관람했던 모 철학과 학우도 나와 비슷한 말을 했다. 이건 그냥 미술작품이지 사진작품은 아니지 않냐고. (맞나? 어쨌든 유사하게 말했던 것 같은데.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당신의 의견을 다시 한 번 제게 정확히 말씀해주시길 바라며.)


물론 제작 과정에서 사진을 직접 촬영하여 이것들을 프로그램을 통해 편집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에릭의 작품들이 정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그 사진들의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의문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사진이었다고 해도 그것을 이차적으로 가공함으로써 만들어진 결과물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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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프리뷰에서도 말했듯이 사진이란 ‘재현(’re’presentation)’의 이미지이다. 사진은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사진기의 렌즈로 종이에 그대로 재현한다. 내가 보았던 책상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쭉 내가 공부를 할 현실세계의 사물인 ‘책상’이지, 없던 날개가 달렸거나 사람의 이목구비를 가진 가상세계의 책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책상을 촬영한 사진은 언제까지고 현실에 존재하는 책상을 재현한다. 하지만 에릭의 작품은 이러한 유형의 사진이라 불릴 수 없다. 그가 작품에 구현한 현상이나 대상들 그 자체는 명백하게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시를 보는 내내 사진전이 아니라 작품전이나 이것 비슷한 이름을 전시회의 제목으로 지었어야 하지 않나, 의문이 들었다. 아니면 적어도 “작가의 작품들이 표면적으로는 사진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초현실주의라는 미술 기법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미술작품이라 보는 편이 적절해 보입니다.” 정도의 부가적인 설명은 붙여 주었다면 좋지 않았을지, 아쉬움이 들었다. 애초에 공상에서 기인한 모든 것들은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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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플라톤의 입체다."

"저게 왜 저기 있어....?"



+)


본인의 전시회에 본인이

태연하게 걸어다니는 작가는 처음 봤다.


처음에 보고 깜짝 놀라서

작가 본인 맞는 건지 잠깐 의심도 했다...


특히 전시회 내부 돌아다니시면서

관리자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시는 걸 보며

이것도 전시의 일부인지, 놀랍기도... 했다.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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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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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onymous
    • 에디터님 프리뷰를 읽고 저도 얼마 전에 전시를 다녀 왔습니다!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사람도 너무 많아서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글에서 이 전시가 과연 '사진'전이냐는 의문을 저도 많이 떠올렸는데요.  어떻게 보면 사진전이라는 전시의 명칭이 그렇게 부당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프리뷰에서 에티넘이 말씀하신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협한 선입견을 탁월하게 해체해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가의 의도나, 기획이 잘 드러나는 방향으로 전시가 구성되지 못한 것 이 아쉬웠네요. 기고 항상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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