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덕업일치 하지 마세요

그렇게 좋아하는 일로 돌아왔다.
글 입력 2019.06.27 00:3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살면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을 무수히도 많이 들어왔다. 이유를 들어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데,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해도 일을 좋아할 수는 없으니, 결국 새 취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이미 유수 영화사 입사까지 마친 내게 이런 충고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최소 30년은 일을 해야 하는 데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흔한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본 적 없던 스무 살의 나는. 그리고 1학년 겨울 방학, 꿈만 같은 일이 찾아왔다. 몸담고 있던 영화 감상 동아리에서 영화 홍보 일을 할 대학생을 찾는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머리는 무조건 단발에 항상 치마를 입어야 한다는 불합리한 조항에도, 나는 이 연락이 다시 없을 훌륭한 기회라고 여겼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뭐 그런 걸 연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는 영화 홍보 작가의 조수가 되었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약 한 달간의 조수 생활은 치욕스러울 만큼 처참했다. 밤을 꼴딱 새워 난생처음 켜 본 포토샵으로 전봇대를 지우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연락을 받으며 매일같이 글을 썼고, 각종 시사회와 GV(관객과의 대화)에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어차피 일을 배우려고 들어간 것이니 돈을 적게 주거나,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은 괜찮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일이고 꿈꿔왔던 일이기 때문에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카톡과 단정하게 묶으면 안 되겠냐는 질문에도 단발과 치마, 화장을 종용하는 사수의 태도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내가 아는 사람이 몇 명인데 너는 영화계에 다시 발붙일 생각은 하지 말라'는 협박을 들어야 했다. 아, 내가 다시는 이 거지 같은 영화계에 돌아오나 봐라. 여전히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본 적 없는 스물한 살의 나는 생각했다.



[크기변환][꾸미기]정다원-감독님-A컷 (1).jpg
문제의 포토샵 사진. 처음치고 티가 거의 안 난다.
사진 속 인물은 <가락시장 레볼루션>과
<걸캅스>를 연출한 정다원 감독님



그때의 충격이 어지간히 컸던 모양이다. 갑자기 마음에도 없던 문헌정보학과를 오로지 '정사서 자격증'을 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한 걸 보면(전공은 아니고 복수 전공이었다). 적성에도 안 맞고, 흥미도 없는 분야니 당연히 수업은 지루하고 학점은 개판이 났다. 그래도 취업 전망이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버텼다. 그사이 남자 친구도 생겨서 영화관은 쳐다도 보지 않게 됐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렇게 좋아했던 영화도 현실에 치여 한 달만 안 보면 그렇게 서서히 잊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운명이란 잔인해서 가끔은 어떤 것에-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불가항력인 중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나에겐 영화가 그 '어떤 것'이다. 결국 나는 우리 학교 영화제 학술팀으로 지원했고, 그 경험을 살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었다.


모든 일은 거지 같다. 정말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일은 일이다. 더 편한 일, 더 돈을 많이 주는 일, 더 직무만족도가 높은 일은 있어도 매일매일 좋아서 죽을 것 같은 일은 없다. 주당 억대 봉급을 받는 스포츠 스타도, 자식들에게는 딱 50억만 물려주겠다는 빌 게이츠도, 팬들의 함성에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아이돌 가수도 일이 싫어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하물며 나 같은 게으름뱅이는 오죽할까. 비록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리 예술과 글쓰기를 사랑하는 나라 해도 마감일이 싫어지는 때가 오는 법이다. 여기 그런 순간들을 정리해봤다. 달리 말하자면, 덕질이 업이 되면서 얻게 되는 행복 속 불행 정도 되겠다.



[크기변환]dbb63ac2932442679aca0832abf65dc6.jpg
최근 SNS를 강타한 미술 작가 양경수 씨의 그림



좋아하는 일이 업(業)이 되면서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는 성과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기인한다.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썼던 글이 나중에는 조회 수에 대한 기대감이 되고, 실망이 되고, 불안이 되고, 부담이 된다. 처음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었을 때는 내 글이 대형 사이트에 올라간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한 번 헤드라인에 오르고 나니 다음부터는 꾸준히 헤드라인에 오를 수 있도록 하자는 목표가 생겼고, 한 번 네이버 메인에 오르고 나니 이번 글도 네이버 메인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문제는, 목표와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부산물이다. 실망감. 실망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잣대는 잘만 사용하면 좋은 피드백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나 자신을 좀먹는 곰팡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부담과 마감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의무감이다. 유명 가수가 잔뜩 오는 페스티벌에 놀러 가고 10만 원이 훌쩍 넘는 오페라 무대를 감상해도 마음이 무겁다면 그것만큼 더 불행한 게 있을까. 좋은 기회라 보겠다고는 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오페라에 대해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감은 안 잡히고 오늘따라 검색 실력도 형편없는 것 같다. 그래도 프리뷰는 괜찮다. 아무 말이나 해도 작품을 감상하기 전이니 잘 몰랐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리뷰는, 벼랑 끝 싸움이다. '무슨 내용으로 글을 써야 하나'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벌써 작품은 끝을 향해 가고 눈 깜빡하면 텅 빈 화면만이 빨리 뭐라도 뱉어내길 기다리고 있다. 일종의 공황발작과도 같은 스트레스가 잠시 스쳐 지나가고, 결국 꾸역꾸역 글을 뱉어내지만, 그럼 그렇지, 그게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오피니언 기고 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매주 글을 쓰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매주 새로운 소재를 생각해 내는 일이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본 영화나 공연, 전시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렇다고 5년 전 얘기를 꺼내서 끄적이기엔 내 기억력의 한계도 있고, 시의성도 떨어진다. 특히 영화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서 잠깐 바빠 시기를 놓치면 글이 완전히 매력을 잃어버린다. 4월부터는 글의 소재를 위해 온갖 전시며, 공연이며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일이 두 배로 늘어난 셈이다. 도저히 적절한 소재를 찾을 수 없어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과제 돌려막기로 겨우겨우 한 주를 버티는 경우도 있었다. 아, 창작의 고통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크기변환]40655949_665484107171666_5851697318839118121_n.jpg
과제 기간만 되면 돌아다니는 마감 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마감과 부담과 의무감에도 글을 쓸 때만큼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심지어는 사수의 압박에 벌벌 떨며 밤을 새워 포토샵을 할 때조차 나는 내가 너무도 생생히 살아 있어 결국은 다시 여기로 이끌리고 말 것이라는 불길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고작 4개월 동안 글을 쓰면서 그 불길함은 확신이 되었다.


분명,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하지만 평소라면 이런저런 핑계에 치여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공연과 전시를 보고, 글을 쓰기 위해 관련 자료를 공부하면서 나는 성장했다. 단순히 발레와 오페라와 뮤지컬에 대한 시시콜콜한 지식만 배운 것이 아니라 나는 글을 한 편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지 배웠고, 글에 들인 정성과 조회 수는 결국 비례한다는 것을 배웠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세상이 존재함을 배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마감이라는 압박 없이는 쉽게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헤드라인에 오르지 못하거나 조회 수가 낮아 실망하기도 했지만, 헤드라인에 올랐을 때는 그 어떤 순간보다 눈을 반짝이며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때로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마음 한구석 응어리진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정말 때로는, 나의 이야기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마음에 와 닿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조회수가 낮든 높든, 헤드라인에 걸리든 안 걸리든, 브런치에 주렁주렁 매달린 글들을 자랑스러워하게 된 것이다. 의지박약에 작심삼일의 표본이던 내가, 4개월 동안 무려 서른 편이 넘는 글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도 싫어했던 나 자신을, 결국 좋아하게 된 것이다.


지식과 경험은 나를 성장하게 했고, 성취감과 뿌듯함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선사했다. 이런 말을 꺼내기는 쑥스럽지만, 그러니까 나는 그냥 글쓰기가 좋았다.



[크기변환]62a97c1e-d2cd-4653-96de-22aac13c2756.jpg
그림 출처: 안충기 기자/화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는 조금씩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버리고 예술을 온전히 즐기는 방법을 배우고 있고, 조회 수나 헤드라인에도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어떤 소재를 골라야 하는지도 조금은 감이 잡혔고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도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나빴던 점만큼이나 좋았던 점도 무뎌지겠지만, 이제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깨달았다.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이다혜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에 등록했고, 부산 국제 영화제에 지원했으며, 망설임 없이 문헌정보학 복수 전공을 취소하고 입학할 때부터 하고 싶었던 융합콘텐츠학 복수 전공을 신청했다(혹시나 해서 덧붙이지만, 문헌 정보학은 흥미로운 학문이다. 단지 나랑은 잘 안 맞을 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일은 거지 같다. 그러니 이왕 거지 같을 거면 그나마 덜 거지 같은 일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새로운 취미를 찾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만큼은 사실이다. 여전히 영화와 책과 드라마는 내 오랜 친구지만, 번역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 걸 보면. 한 번, 두 번은 우연이지만 세 번은 인연이라고 한다. 중학교 문학영재 산문집과 고등학교 독서 토론 동아리 문집을 바라보며 아트인사이트가 인연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부끄러운지 괜히 볼멘소리도 하나 던져본다. 내 인생의 불행과 행복은 이제 모두 당신 탓일 거라고.


좋은 날, 좋은 사람, 좋은 기회를 만나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김나경.jpg
 

[김나경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