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을 위한 사의 찬미 [TV/드라마]

드라마 사의 찬미 Review
글 입력 2019.07.0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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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사의 찬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 윤심덕이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국어 가사를 붙여 녹음한 번안 가요이다. 음울한 멜로디와 시적이고 염세적인 가사가 특징인 이 곡은 윤심덕이 그녀의 연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지기 불과 이틀 전 녹음되어 수많은 해석과 추측을 남긴 바 있다.


도쿄음악학교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었던 윤심덕과 촉망받던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 자살, 그리고 유언처럼 남겨진 ‘사의 찬미.’ 그들은 왜 죽음을 찬미하며 바다로 몸을 던져야만 했을까.




드라마 ‘사의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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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과 윤심덕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이미 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형태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각 장르는 두 인물의 사랑과 죽음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뮤지컬 ‘사의 찬미’가 두 인물이 ‘사내’라는 가상의 인물과 정해진 결말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주 서사로 다루었다면, 드라마 ‘사의 찬미’는 두 주인공의 사랑에 좀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나는 열렬히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들었다. 이 악마의 포위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의 안일을 준 것은 그녀였다.


- 1921년 11월 26일, 마음의 자취



두 주인공의 사랑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점은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여 결말의 비극성을 극대화하였다는 점에서 드라마 ‘사의 찬미’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여느 다른 멜로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드라마적 장치들이 다소 보인다는 점이다.


이 멜로드라마적 요소는 인물들의 현대극 같은 말투와 어우러져 ‘사의 찬미’만의 음울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저해한다. 또한, 시청자들이 실제 ‘사의 찬미’의 배경이 된 시대적 분위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드라마적 장치 없이도 이미 충분히 불꽃 같았던 그들의 사랑을 좀 더 담백하게 그려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생을 위한 사의 찬미




난 선생이 삶으로부터 도망친 거로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선생은 살고자 했던 겁니다. 가장 자신다운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선생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나다운 삶을 살아볼 생각이에요. 설령 그 삶이 생의 종말일지라도.



순회공연을 마치고 난 이후 우진은 원치 않은 혼인을 하고 뜻이 없던 가업을 이어나간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다울 수 있는 시간은 글을 쓰고 심덕과 편지를 나누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버지에 의해 오래가지 못한다. 우진은 그런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도쿄로 떠나지만, 그의 글을 모조리 불태우고 곡기까지 끊었다는 아버지를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한편 심덕은 가족들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등록금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감동하여 모든 비용을 대주겠다는 후원자가 나타나 잠시 희망이 보이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한다. 후원자와 심덕을 둘러싼 더러운 소문이 퍼졌기 때문. 이 소문 때문에 심덕에게는 더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고, 동시에 그녀는 조선총독부의 촉탁가수가 되라는 협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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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심덕을 포기하고 원치 않은 혼인과 가업을 이어나가는 삶은 우진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글과 심덕을 위해 곡기를 끊은 아버지를 저버리는 것 역시, 우진 그 자신으로 사는 삶일 수 없다. 심덕도 마찬가지다.


조선총독부의 촉탁가수로서 살아가는 것은 그녀의 영혼을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일제의 협박에 가족들을 모른 체하는 것 역시 그녀 자신일 수 없다. 자유 의지를 잃어버린 모순덩어리 같은 그들의 삶은 이미 생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그런 우진과 심덕에게 죽음은 그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생에서 그들이 그들 자신일 수 있는 길은 없다. 자유 의지로 선택한 죽음만이 생의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다. 나 자신이기 위해 나를 버리고, 생(生)을 위해 사(死)를 찬미하는 그들의 삶은 어쩌면 모순 그 자체다.


도망치자고, 가족 같은 건 버려도 좋다고 말해달라고 애원하는 심덕에게 우진은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한다. 그게 우진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족 같은 건 버리고 함께 떠나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심덕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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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예정된 새드엔딩이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 모두를 포기할 수 없는 그들 자신이었기에 그토록 애절했고, 아름다웠고, 비극적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살고 있소?”


“아니오.

그러나 死를 바라고 있소.

참으로 살려고”


- 1926년 5월 4일, 시 死와 生의 이론



[황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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