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브루타뉴 해변을 그렸던 화가에 대한 충실한 회고, 베르나르 뷔페전

글 입력 2019.07.03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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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ard Buffet. Tempête en Bretagne


1999년 10월 5일, 71세의 베르나르 뷔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파리 화단을 지배하고 추상회화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던 마티스와 피카소에 대항하는 구상회화의 왕자, 유명해진 후에는 고성과 롤스로이스를 구매해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들었던 아트스타의 죽음이었다.


성공한 화가의 끔찍한 선택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그의 파킨스 병을 이유로 들었다. 날카롭고 세련된 서명은 삶의 끝자락에서 힘을 잃었다. 어머니와의 추억으로 대표된 잔잔한 부르타뉴 해변에 처음으로 해일이 일었다.

베르나르 뷔페가 파리에 위치한 리세 카르노 중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치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개선문을 나서는 나치군도 어린 뷔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허약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뷔페는 학교를 다니며 1942년 파리시에서 운영하는 드로잉 야간 수업을 수강했다. 이 시절 그는 모든 불행을 그림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쉴 틈 없이 그림을 그렸다.


뷔페는 1943년, 어린 나이로 국립미술 고등학교에 입학해 구상화가인 외젠 나르본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재능을 인정받았다. 1944년, 나치는 파리에서 물러나고 1945년 뷔페는 방학을 맞아 어머니와 함께 브르타뉴 지방을 여행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는 화가를 꿈꾸는 뷔페를 위해 루브르에 데려가는 등 마음으로 뷔페를 보살폈다.


이때의 기억이 특별했는지 뷔페의 그림에는 브루타뉴 해변이 간혹 등장한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에게서 뇌종양이 발견되었고,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3개월 후 사망했다. 어린 뷔페는 큰 충격을 받아 에꼴 데 보자르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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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사회적 사건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개인적 사건이 겹치면서 그는 암울한 현실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굶주리고 무표정하다. 자코메티의 작품처럼 뻣뻣하고 예리하게 채워진 검은 윤곽, 금욕적인 구도로 고통스러운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하는 그림은 전쟁 후로 고통받던 동시대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렇게 1948년에 이르러 그의 캔버스는 검정색, 흰색, 회색으로 채워졌다. 개인적으로는 실제 감상에 있어서 생채기처럼 긁혀진 붓터치가 인상 깊었다. 나무 판에 그린 것처럼 긁혀진 선들은 이번 전시회의 후반 부분까지 남아있는 특징이었다. 이처럼 추상회화처럼 복잡하지 않지만 깊은 메시지를 담보했던 그의 구상회화는 인간의 실존을 깊게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뷔페는 마침내 그 특유의 표현을 인정받아 고작 20대 초의 젊은 나이에 1948년 '젊은 작가들을 위한 경연'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다음년도에는 전시회가 열렸다. 1949년 6월에는 당대의 미술 비평가들에게서 비평가상을 받았고, 그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부를 얻은 와중에 그가 평생을 바쳐 사랑하게 될 에나벨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삶은 모든 것이 완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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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 빠르게 성공가도를 걸은 뷔페 였지만, 그 추락도 빨랐다. 명성과 부를 얻은 뷔페는 롤스로이스와 300년된 고성을 구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운전 하는 방법을 몰랐다. 필자가 들은 도슨트에서는 그것이 가난하고 비참했던 어린시절의 보상일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건, 뷔페의 행보는 대중들로하여금 화가가 아닌 샐럽으로 생각하게 만들었고, 평론가들은 화가의 삶에 의문을 나타내고 상업적 화가라는 비난을 일삼았다.

미국 등 서방세계는 추상표현주의를 자유의 상징으로 내세워 정책적으로 지원했고, 이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수혜를 받아 큰 목소리를 가지게 된 미국은 문화영역에서 주도권을 갖기 위해 추상 표현주의를 선전했다. 프랑스 예술 이론가인 장 뤽 샬리모는 베르나르 뷔페의 시대가 70년대 이후 끝났다고 주저없이 이야기 했으며, 렉스프레스지 평론가는 뷔페의 작품이 소개된 특집방송에서 그의 전람회를 방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프랑스 회화에서 큰 업적을 남긴 뷔페였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그의 전시관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프랑스 내부의 평가가 크게 작용했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다.

뷔페는 이전과 같이 인간에 대한 실존에 대해 고민하는 작품을 그리는데 주력했으나, 평론가들은 뷔페가 죽기 전까지 정열을 다하여 그렸던 그림에 대해서 냉혹한 평가를 일삼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뷔페는 그림을 그렸고, 마지막 순간 '죽음' 시리즈를 그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천재화가나 샐럽으로 유명했던 뷔페의 실제 성격은 순박하고 섬세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영감이 아니라 손이 그림을 그린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남긴 유서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글씨가 삐뚤삐뚤했다는 이야기와 마지막 죽음 시리즈의 투박한 붓터치는 그가 왜 생생한 죽음을 그렸어야 했으며,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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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이번 베르나르 뷔페전이 굵직한 작품들을 충실히 전시할 수 있었다. 뷔페의 그림은 시간이 지난 후 프랑스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도슨트에 따르면 그의 작품이 이렇게 전시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광대', '천재'로 홍보된 뷔페의 전시전이지만, 무표정의 인물들과 배경을 채우는 브루타뉴의 해변은 '천재화가' 뷔페보다는 '인간' 뷔페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의 전시회를 감상한 리뷰에 그의 삶을 끼워넣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필자가 전시회에서 본 것은 한 인간의 삶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뷔페는 냉소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그가 추구했던 것은 저 멀리의 무언가였다.

필자가 위에 업로드한 그림을 주목해줬으면 한다. 전시회장에서는 프랑스 전통 복장을 한 여인이 브루타뉴 해변의 특산물과 함께 있는 그림과 함께 걸렸다. 인간의 실존과 고통을 고민한 뷔페지만, 멍하니 멀리 바라보고 있는 뷔페의 등장인물들, 나아가 바로 그 자신을 그린 그림에서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아련히 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시선이 공허한 삶에 던져졌다고 생각했는데, 갤러리를 돌고보니 무언가를 향해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읽은 뷔페의 그림은 비극을 향해 내달리지 않았다. 그가 그리는 삶은 고통스럽지만, 저 멀리 어딘가, 아마 그의 아내와 어머니라는 사건과 상징으로 대표되는 무언가였던 것 같다. 그가 그림에 몰입해있었던 것은, 그 행위 자체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행위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에게는 그림이 저 멀리를 바라보는 행위였으므로 정말로 구원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까지가 '인간' 뷔페에 대한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에 있어서, 그는 철저하게 예술가였다. 예술가라고 해야할까, 그가 기억되길 바랬던 대로 광대였다. 필자는 뷔페가 죽음을 끝으로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의 연장으로 선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렸던 죽음의 모습이 장기와 성기를 가진 것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필자는 뷔페가 그린 죽음에서 가슴 떨릴 정도의 활기를 느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삶이였으므로, 그림을 더 그릴 수 없다면 삶이 끝나는 것이 맞다.


그에게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예술을 삶자체로 놓은 행위자로서의 연장이었다. 그에게 죽음은 한 개체로서의 끝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행위 자체의 연속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행위까지 기억된다면, 그는 그가 바랬던 것처럼 광대라고 할 수 있겠다. 광대는 현실이 아니라, 저 너머를 보고 저너머의 세계를 재현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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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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