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라져가는 장소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기타]

글 입력 2019.07.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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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불현 듯 마음을 지핀다.


우연히 ‘불후의 명곡’(음악프로그램)에서 정지용의 시 ‘향수’를 노래로 부르는 영상이 봤을 때 가 그랬다. ‘향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린 작품으로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때 시험문제로 자주 마주하곤 했었다. 당시에는 시험문제로만 인식되었던 시였는데 현재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하니 확실히 달랐다. 한 구절 한 구절이 귀에 꽂힐 때마다, 시가 그리고 있는 고향에 대한 풍경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향수



정말이지. 고향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을 다 끄집어 낼 정도로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시다. 마치 내가 화자라도 된 것처럼 ‘고향’이라는 대상에 대한 정서의 진폭을 크게 울린다. 그래서일까. 순식간에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골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가 도시로 올라와 지하철 안에서 양복을 입은 채 다른 의미로 사람들과 부대끼는 사람의 이야기. 그 사람은 처음에 아빠가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그리고 내가 되었다. 마음이 크게 일렁거렸다. 오랜만에 고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16년을 살던 곳. 이사온 지 9년이 되어가도록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그 곳을.




공간(space)



살았던 동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후각이 자극된다. 쾌쾌한 하수구 냄새와 온갖 음식물이 뒤섞여 나는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 그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는 다닥다닥 밀집되어있는 가게들과 그 가게들이 밝히는 조명으로부터 주황빛으로 물든 거리, 그 가운데 내 다리의 알을 키워준 높은 언덕들이 그려진다.


매일 집 밖 창문을 내다보면 골목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노상방뇨를 하는 아저씨나 삥을 뜯고 있는 양아치들의 모습이 보였다. 묘사된 바와 같이 주거환경이 그리 좋지 못했다. 거칠고 더러웠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고향과 비교하면 천국이다. 깨끗하고, 쾌적하고, 넓고, 주변에 모든 것들이 잘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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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에 고향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살던 그 동네에 있던 가게들과 집을 다 갈아엎고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뒤늦게 지금 찾아가도 내가 살았던 곳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들었을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정지용의 ‘향수’를 듣고 나니 고향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은 삶의 한 부분이 뻥 뚫린 것과 같은 상실감과 허망감으로 돌아왔다.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에 비해 당황스러울만큼 강한 향수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나에게도 고향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고향은 단순히 냄새나고 지저분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나는 그 공간을 싫어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 쌓은 추억은 사랑하고 있었다.




장소 (place)



어렸을 적 살던 동네의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만큼 동네 사람들과의 거리도 그랬다. 특히나 엄마가 그 중심에서 책대여점을 운영하셔서. 주변의 모든 상가 주인들은 엄마의 친구였고 단골손님들도 굉장히 많았다. 단골손님들은 책을 빌리러 올 때마다 빵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등을 나에게 안겨다 주었고, 나는 기꺼이 할인을 해주거나 연체를 봐주기도 했다.


동네를 지나가서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옆집 분식집에 놀러가 500원짜리 떡볶이와 그 두 배가 되는 튀김을 서비스로 받고, 분식집 딸, 아들과 함께 먹고 놀고 했었다. 같은 빌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다운 이웃이 되어 항상 서로 무언가를 나눠주거나 챙겨주었다. 정 많은 사람들이 항상 부대끼며 생활하니 고향은 마치 동네를 물들인 주황빛처럼 따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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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향에서 유년시절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사람에 대한 애정을 쌓았고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그곳은 아직도 수많은 모습과 추억들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공간’과 ‘장소’를 구별할 때, 공간(space)이 단순히 물리적 접촉만이 일어나는 물리적 공간이라면, 장소(place)는 반복된 만남과 복잡한 연계를 통해서 정체성과 타자성을 가르는 원천이라고 한다.


확실한 공동체가 있으며, 개인은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된다고 한다. 고향은 나의 어렸을 적 정체성의 근간이 되어준 기억과 애정이 담겨진 ‘장소’였다. 그런 장소가 다시는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게 사라진다고 하니, 마치 나의 어렸을 적 추억들도 함께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상실감과 허망감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사는 곳은 당연하게도 옆집과 앞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른다. 다들 멀찍이 떨어져있는 만큼 사소한 관심조차도 간섭이 될 거 같았다. 무관심이 예의가 된지는 오래고, 나조차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머리가 커질수록 가족과 친한 친구를 제외하고 모두가 나에게 무관심한 이 공간에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정지용의 시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점화된 것처럼 어떠한 계기로 고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 서글프고 공허하다. 아마 다시는 그때처럼 이웃과 정다운 관계를 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 같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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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접촉하는 ‘공간’은 많아지지만 ‘장소’는 줄어들고 있다. 사회도 그래 보인다. 끊임없는 변화는 장소들을 눈 깜박할 사이에 해체되고 분열시킨다. 거기서 비롯되는 삭막함은 서글픔을 불러온다. 인간의 아름다운 감수성이 보존된 수많은 ‘장소’들을 ‘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잔혹하다. 이것이 나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건지 사회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현재로서는 고향을 떠나오고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것이 후회가 된다. 내가 가장 싫어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받았던 미성숙한 나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거 같다. 정말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가 되어버린 나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뒤늦게 그 흔적을 여기에 남기고 싶다.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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