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늘부터 나는 시인이 되기로 했다. [문화 전반]

궁핍한 시대의 시인의 사명
글 입력 2019.07.0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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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는 시가 뭐라고 생각해요? 예지는 시인인가요?"

시에 대한 수업을 신청하고 나서 첫 시간에 받았던 질문이었다. 평소 존경했던 교수님이 진행하는 강의였고, 좋은 학점을 얻기엔 힘들지만 진정 대학 강의다운 강의라는 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수강신청 버튼을 눌렀던 어리석은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그 파노라마에는 난해한 강의내용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내 모습도 함께 그려졌다.

"아… (매우 당황) 시요 멋진 비유를 주로 사용해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예를 들면 독립 의지 같은 거요 그런 것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태주 시인 같은 분만큼 감수성이 풍부하지가 않고, 글을 쓸 때 기교는 못 부리는 것 같아서 시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나 피상적인 답변이던가. 쓸데없는 자기 고백이 섞인 대답에 달아오른 얼굴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의 후회와 조금 길었던 당황, 민망함 끝에는 이 수업을 어떻게든 완수해내겠다는 오기가 따라왔다.

며칠을 돌아 마주한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시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리드리히 횔덜린 등 명망 있는 시인과 학자들의 말을 바탕으로 함께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우리나라 인문학의 거장이신 김우창 교수님께서 한용운 시인을 들어 시인의 사명에 관해서 쓴 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참으로 와닿았다.

가늠하기 어려운 사상과 깊이를 가지신 분의 글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나름대로 해석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내가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로 글을 쓰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만의 쉬운 언어로 천천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김우창 교수님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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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교수

*
개인적 주관이 들어간 해석입니다.


한용운 시인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구국운동과 절대적 무력감 사이에 끼어 순종하기에도, 행동하기에도 곤란한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절실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회의 원리와 완벽한 선, 그리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의인(義人)에 대해서 생각하고 꿈꿔왔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종교적 관점에 크게 의지해있다고 한다.

종교적(기독교적) 관점에서 신과 세상과의 관계는 '부재를 통한 확인'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타락한 세상에 신은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현실 세상 이외에 신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신은 부정과 부재로서만 확인된다. '신은 숨어있는 것'이다. 만약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 현실 세계에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인간과 똑같은 과업을 수행하며 쉽게 이를 수 있는 존재였다면, 현재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로 생각될 것이다.

종교에서의 세상과 신에 대한 관점과 한용운 시인의 현실 세계와 의인에 대한 관점은 매우 유사하다. 타락한 시대적 상황, 현실 속에서 진실은 없기에 완벽한 선,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회의 원리는 현실의 타락과 부정으로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부정의 순간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철저히 윤리적이고 세상은 광명에 차있음을 확신한다. 종교적 관점에서의 신과 같이, '광명은 숨어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있어서 의인이 하는 일은 숨은 광명을 위해서 증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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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선생의 서대문 형무소 수형기록표


한용운 시인은 현실적 제도의 문제에도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3.1운동 조직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궁핍한 현실 속에서 부정한 것을 고치기 위해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 속에서 행동한 혁명가였다.

반면 그는 시를 쓰며 언젠가 찾아올 광명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숨어있는 광명을 증언했다.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고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파악되는 선을 추구하며 숨은 광명을 찾기 위해 펜을 들고 행동했던 의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순수한 혁명가도, 순수한 의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대에 필요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불행하나, 영웅을 낳지 못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는 베르톨로 브레히트의 말을 바탕으로 김우창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웅의 시대보다는 의인의 시대가 더 불행하다. 하지만 의인을 낳지 못하는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 또 의인다운 시인일망정 시인만을 가진 시대는 더욱 불행하다.


영웅은 시대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사람을, 의인은 상황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희망을 품고 광명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을, 시인은 그저 글만 쓰고 향유하는 사람을 의미한 듯하다.

한용운 시인은 '님의 침묵'의 발시(發時)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읍니다.



그는 불행의 종말을 예상하고 그 종말과 더불어 그의 시가, 지난 계절의 꽃이 될 것을 바랐다. 현재, 우리는 늦은 봄의 꽃 수풀에 있는가?



개인적 감상

우리는 꽃 수풀에 있지 않다. 한용운 시인의 시대는 민족 전체가 피지배국의 형상으로 몰락하고, 외세와 민족 역량에 엄청난 질량 차에 짓눌렸던, 가시적으로 몰락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시대는 가시적으로 쉬이 확인할 수 없는, 훨씬 더 교묘해진 몰락의 시대이다.

G20, OECD와 같은 멋진 타이틀로 국제 사회에서 입지를 공고히 다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소외, 양극단의 갈등, 인권 문제, 빈부격차, 인간성의 상실 등 다양한 문제들로 얼룩져있다. 큰 경제 규모로 증명되는 강대국의 탈을 쓴 상태에서 사람들은 의인과 의인다운 시인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주권 밑에 산재해있는 문제들은 당장 공감되지 않기에 필요가 없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버텨내는 하루에 지쳐 생각할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대인들은 완벽한 선, 광명을 생각하기보다는 순간의 광휘와 쾌락에 빠져 자신을 위로하기 쉽다.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든,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인간문화의 격동, 이에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점이 나타나는 현시점에서 의인의 역할을 해냈던 시인 한용운의 역할이 다시 제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현 사회에 대한 고찰 후에는 첫 수업 시간, 교수님의 질문에 답변하던 나를 떠올렸다. 나는 왜 문학적 기교, 감수성, 아름다움, 세기의 예술가라는 단어들로 시인을 한정 지어 의로운 시인이 설 구석을 밀어내는 것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는가.

자작시를 끄적여 이 정도면 멋있지, 수줍게 블로그에 올리며 얄팍한 허세를 부리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다. 나름대로 예술을 사랑한다고 이곳저곳 자랑하고 끄적였던 내가 결국엔 궁핍한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순간의 광휘와 잠깐의 문학적 기교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이 내던지신 질문과 김우창 선생님의 글은 내 마음속에 참회록을 새기게 했다. 참회록 끄트머리에는 힘을 주어 더 깊이 글자를 새겨넣었다. 오늘부터 나는 시인이 되기로 했다. 의로운 시인이.


[태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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