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봄이 오나요? 비가 오네요. [문화 전반]

봄, 비, 사랑 - 장범준, 신중현
글 입력 2019.07.07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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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느 비 오던 봄날, 친구 자취방에서



지난 봄이었다. 오랜만에 친구 집 자취방에서 맥주 한 캔씩 까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5평 남짓한 방에 자그마한 탁자하나 가져다 두고 집 앞 편의점에서 사온 오징어 땅콩 한 봉지를 안주로 삼아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서로 요즘 뭐하면서 사는지 물어보다가, 둘 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하고 한량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상호 확인하고 인문대생이면 누구나 하는 일상적이고 자조적인 “아 졸업하고 뭐 먹고 살지”와같은 푸념으로 끝나는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얼마였을까, 둘 다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입은 꾹 다문 채로 애꿎은 오징어 땅콩만 열심히 손에서 굴려보다가 무심한 척 맥주를 홀짝이며 상대 눈치를 살피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면 이 어색한 침묵을 자연스럽게 깰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 보다가 연애 이야기정도가 둘 모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 가볍게 그냥 툭, “요즘 뭐 없냐?”라고 질문을 던져 보았다. 질문을 듣자마자 오묘하게 변하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역시 나의 주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바로 깨달았다. 나도 바로 흥미가 동해서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띤 채로 거의 반쯤 누워 있던 무기력한 자세를 고쳐 앉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구가 조금씩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새벽에 같이 벚꽃이 핀 캠퍼스를 산책하기도 하고, 진지한 대화도 나누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 때 당시에 달달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아주 그냥 내가 다 설레곤 했다. 흔히들 말하는 ‘썸’을 타거나 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봄이 온다’고 표현하고는 하지 않는가. 그래서 친구 이야기를 듣다 말고 내가 중간에 물었다. “봄이 오나요?”


그런데 아주 대답이 걸작이었다. 친구는 내 질문을 듣고 잠깐 궁리를 조금 하더니, 갑자기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때 마침 창 밖으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친구는 창 밖을 우두커니 한 십여 초정도 바라보고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비가 오네요.” 순간 당황했다. 보통 ‘봄이 오냐’는 질문에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은 예 혹은 아니오이다. 둘 다 정 아니라면, ‘나는 잘 모르겠다’정도의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비가 오네요’는 정말이지 예상할 수 없었던 답변이었다. 단순히 예상할 수 없었던 답변이었다면,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당황했던 이유는 그 답을 듣고, 오히려 너무나 그 친구의 감정이 잘 전달되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바로 ‘비가 오네요’라는 답의 의미를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너무나 잘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마치 현승(賢僧)과 선문답을 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선기(禪氣)넘치는 묘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답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헤치고 싶어졌다. 그렇다. 이 글의 목적은 ‘비가 오네요’라는 답변이 도대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같이 한 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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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술 먹고 막차를 놓쳤는데 택시 타기는 싫어서 집까지 걸어가면서 찍은 사진이다.
우산이 없어서 비 맞으면서 걷던 기억이 생생하다.

 

 

1.


 

일단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관습적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을 두고 ‘봄이 온다’라는 쓸까? 가장 생각하기 쉬운 답변은 봄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순간과 닮아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닐까? 겨울 동안 메말랐던 가지들에 꽃이 하나씩 피기 시작한다. 생명들이 잉태되고, 잠자던 개구리들이 지면으로 기어 나온다. 무언가 시작되고, 생겨나기 시작한다. 날씨가 따뜻해진다. 봄이라는 단어가 시작과 생명, 변화와 활력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치 사랑하지 않고 있던 마음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조금씩 생겨나는 모습이나, 마음 속의 감정이 마구 커지는 모습들이 이런 이미지랑 닮아 있다. 그렇기에 ‘봄이 오나요?’라는 질문을 우리는 ‘당신은 사랑을 시작하고 계시나요?’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이 정도면 질문에 대해서 완벽히는 아니지만, 앞으로 ‘비가 오네요’라는 답변의 의미에 대해서 탐색하기 위해서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의미를 명확히 해두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비가 오네요’라는 답변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질문을 분석할 때 우리가 질문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이 주는 이미지에서부터 분석을 시작했었다. 마찬가지의 방법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가 오네요’라는 답변에 대한 분석의 시작점은 ‘비’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비’라는 단어는 여러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다. ‘비’라는 단어의 앞과 뒤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천차만별이다. ‘이슬비’, ‘보슬비’, ‘장대비’, ‘여우비’...... 비를 일컫는 한국어 단어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직관에 좀 호소하고 싶다. 내가 질문에서 ‘봄’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기도 했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계절도 봄이었고, 밖에 내리던 비도 봄비였으니, 그 친구가 ‘비’라고 말한 것이 사실 ‘봄비’였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친구의 답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봄)비가 오네요.”


자 이제 살펴 볼 대상이 명확해졌다. 이미지의 탐구로 답변의 선기(禪氣)를 해체하는 와중이었으니, 봄비의 이미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봄비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조금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내 능력이 짧은 탓에 봄비에 대해서 사람들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을 이미지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려움에 봉착했다. 여기서 탐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인가?




2.


 

그럴 수는 없다. 문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봄비에 대해서 가지고 있을 이미지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이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이리 저리 고민을 좀 해보다가 불현 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봄비에 대한 대중가요의 가사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그 노래들에서 묘사하고 있는 봄비의 모습과 심상을 살펴본다면 어떤 공통적이고 대중적인 봄비에 관한 이미지들을 추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 아닌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먼저 장범준의 <봄비>다.

 





그녀를 잊어보려 하지만

비가 또 내려 모르는 이 맘

난 지금 비가 오면 떠올라

네가 더 내려오려는 이 밤


...(중략)


우 아름답죠 늘 그저 바래다 줬어

어쩌나 그녀와 이 비를 또 기다리고 있어

한 번 더 그녀의 집 앞을 거닐다

기다렸던 비가 떨어지면

한 번 더 그날의 사랑을 원하고

사랑에 봄비가 떨어진다.



떠나 가 버린 연인에 대한 노래이다. 헤어진지는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마음의 정리가 완전히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우울한 기분을 잡고 있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비는 봄비다.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봄비다. 그녀를 잊고 싶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 마음도 모르고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 한 방울 한 방울에 그녀가 떠오른다. 그래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비이기도 하지만, “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와 이 비를 또 기다리고 있어”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나’는 비 때문에 생생하게 나에게 떠오르는 그녀의 추억과 함께 봄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비는 곧 그녀다. 그래서 ‘내’가 비를 기다리는 것은 곧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을 어쩌겠는가. 아무리 속앓이를 하면서 옛사랑을 그리고, 아쉬워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러나 헛된 희망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집 앞을 거닌다. 그 때 그렇게 ‘기다렸던 비’가 왔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그날의 사랑을 원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곡 더 살펴보자. 신중현의 <봄비>다. 복면가왕에서 하현우가 리메이크했던 곡이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길으면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내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외로움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우산을 쓸 기력마저 없어 보인다. 그냥 빗속에서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을 뿐처럼 보인다.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오직, “내 눈 위”에 흐르는 비일지 눈물일지 모르는 물방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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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찍은 고양이 사진.
메테오라의 수도원에서 만난 친구다.


두 곡정도만 살펴봤지만, 이쯤에서 슬슬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다. 이 두 곡뿐만 아니라 대중가요에서 봄비를 다루고 있는 곡들은 전부 이런 느낌이다. 믿기지 않으면 직접 찾아보아도 좋다. 대부분 봄비를 보고 우수에 젖은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후회를 가사에서 표현하고 있다. 봄비를 보면 무언가 쓸쓸하다. 외롭고, 고독한 이미지가 보통 떠오르는 것 같다. 살펴 본 노래들에서 각자가 봄비를 보고 떠올리는 구체적인 대상은 모두 다르다. 장범준은 떠나 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신중현은 스스로의 슬프고 외로운 마음을 곱씹는다. 그러나 둘 모두 후회와 외로움, 고독, 쓸쓸함의 이미지를 봄비를 보고 떠올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3.


 

왜, 봄비는 이렇게 외로움과 고독함, 후회와 쓸쓸함의 감정과 연계되는 것일까? 아마 봄비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우리가 봄에게 기대하는 것과는 무언가 이질적이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러니까 봄비의 이미지가 봄과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날씨가 풀리고, 꽃들이 피어나고는 하는 계절에, 난데없이 추적 추적내리는 비라니. 그런 의미에서 봄비는 봄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톨이 같은 친구다. 봄비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이런 측면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봄비를 바라보며 우리는, 내 주변의 상황들과 조건들은 봄처럼 따스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 같다. 비유를 하자면, 초대 받지 않은 파티에 참석해버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초대 명단에는 내 이름이 잘 못 적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봄에 어울리지 않는 봄비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친구의 ‘비가 오네요’라는 답변을 이제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이 친구한테 봄은 왔다. 계절이 바뀌며 기온이 오르고,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감각했다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봄이 왔다. 상황적으로도 봄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캠퍼스도 같이 걷고, 새벽에 같이 이야기도 하고. 모르겠지만 이 친구도 스스로 이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무언가 미묘한 ‘썸씽’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친구가 어떻게 정말로 생각하는지는 모르는 것이니, 가장 안전한 추론은 최소한 ‘그 친구가 자신에게 ‘썸씽’이 생길 수 있을만한 조건이 마련되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일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올 수밖에 없는 것처럼 물리적으로 봄이 오는 것 자체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봄 같은 상황과 조건들 속에 자신이 놓이는 것도, 여전히 마음 외부의 일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통제할 수 없어 보인다. 봄은 그렇게 이미 만개해서 내 외적인 세계를 모두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정말로 내 마음 속에는 봄이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봄이 오나요?’라는 질문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창 바깥을 바라보고 있자니,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 저 친구도 나처럼 봄이랑 어울리지 않는 친구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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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고양이를 들여다 볼때,
고양이도 당신을 들여다 본다." - 니체



4.



이런 생각의 흐름에서 친구는 ‘비가 오네요’라고 답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이렇게 친구의 묘한 답변을 구체화 시켜놓고 보니, 원래의 대답이 가지고 있었던 선기(禪氣)가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이 글을 친구에게 읽혀보고 싶다. 그 친구는 이 분석이 맞다고 생각할까?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완전히 자신의 의도를 오해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그렇지만, 별로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한 작업은, 친구의 한 마디 말로부터 내 나름대로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어느 한 문장에 대해서 어떤 서사가 올바르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어떤 서사가 더 재미있는가?‘ 정도는 따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친구가 스스로 구성한 서사는 얼마나 재미있을지 궁금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비가 오네요‘라는 대답에 어떤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어쨌든 이게 내가 제시하는 나름의 분석이다.



[김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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