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만약 베스트셀러도 못 되고, 진지하지도 못 할 바에는 놀라게 할 수밖에. [도서]

글 입력 2019.07.08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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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문학계에서 퀴어 문학은 빠질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었다. 사회의 보다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고 했던 작가들의 꾸준한 노력과, 독자들의 의식 성장이 동시에 일어난 반가운 결과다.


소수자의 서사는 그들을 하나의 소재거리로만 인식해 ‘대상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만, 지금 전 세계적으로, 또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퀴어 문학은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투명하게 그려내는 고백과 이해의 장이 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존중받을 때 사회가 보다 다채로워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문학계의 흐름은 보다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하나의 책이 있다. 바로 논바이너리 레즈비언 대만 작가 구묘진의 ‘악어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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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구묘진은 대학시절부터 <죄수>로 <중앙일보> 단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구독한 대중>으로 대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연합 문학>중편소설 신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다.


특히 오늘 소개하는 구묘진의 책 <악어노트>는 1994년 소설이 출간된 뒤로, 악어노트의 주인공의 별명인 <라즈>가 ‘레즈비언’이라는 뜻의 중국어 은어의 기원이 될 정도로 중국어 문화권에 강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더불어 대만 LGBT 인권 운동뿐만 아니라 지난 5월 대만에서 이루어진 동성 결혼 합법화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뉴욕에서 번역 출간되면고 다양한 번역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뉴욕타임즈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퀴어, 어린이 책을 주로 다루는 출판사 ‘움직씨’에서 2019년 출간되었다. 이처럼 독자들을 매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꾼 악어노트의 매력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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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노트의 매력 중 하나는 논바이너리, 즉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는 성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인물의 언어를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논바이너리 레즈비언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라즈의 일기와, 라즈와 같은 퀴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악어로 비교한 우화가 교차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악어가 등장하는 우화를 통해 990년대, 퀴어 차별이 팽배한 대만 사회를 살아가던 젠더퀴어 당사자의 자기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독자가 만약 퀴어라면 책장을 넘기는 순간마다 무릎을 치며 공감할 것이고, 퀴어가 아닌 독자가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논바이너리 LGBT 감성의 문장들은 섬 이분법적,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 익숙해져 있는 인식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악어를 통해 볼 수 있는 사회의 단면은 유쾌하지만 치밀하고 섬세해 읽는 도중 가슴이 자주 선득 해진다.



음경 대 질, 가슴 털 대 유방, 수염 대 긴 머리. 음경과 가슴 털과 수염은 양으로 규정짓고, 질과 유방과 긴 머리는 음으로 규정지어 양이 음으로 들어가 자물쇠를 열면 빙고! 아이가 나오는 것이다. 무조건 빙고 소리가 들려야만 바둑판을 완성할 수 있으며, 이외에는 양이든 음이든 다 무성으로 간주해‘아웃사이더’라는 찬 바다로 던져 버린다. 더 넓게는 ‘주변인’ 취급을 한다. 사람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잘못된 대우에서 오는 것이다. - P.74


누가 알겠나? 사람들은 악어를 못 알아본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악어 뉴스의 충실한 관중이다. 그들은 학원에서 돌아와 마침 저녁을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만 방송 뉴스 보도臺視新聞世界報導’를 본다. 가장 냉담한 연령층인 대학생들은 악어와 관계가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신문이나 뉴스 상의 관련 보도들과 거리를 두는 자세로 바뀌었다.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악어가 이 그룹에 가장 많이 혼재해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 P.87



악어노트에서 주인공 리즈와 그의 곁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서로의 관계를 진행시켜나가며 청춘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이를 통해 한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퀴어로서의 주체가 겪는 내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악어노트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다. 특히 그들의 사랑, 미움, 우정과 같은 감정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라즈가 겪는 이야기는 언뜻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가 겪는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를 닮아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악어노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이 몇 번 등장하며, 라즈의 연인 수령을 리즈는 상실의 시대 주인공 와타나베의 연인 ‘나오코’라고 부르고, 무덤에 가져갈 단 하나의 책을 고르라면 '상실의 시대'를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악어노트 상실의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하지만 라즈의 사랑은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인 와타나베의 경우와는 달리, 퀴어가 겪는 혼란과 차별에 얽혀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상실의 시대의 이야기의 주체인 와타나베의 서사가 남성 중심적 성애만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라즈’의 이야기는 ‘상실의 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체의 이야기며, 그 주체가 경험하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 수 있음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어노트에서 보여주고 있던 사랑, 미움, 우정과 같은 감정은 퀴어가 아니더라도, 청춘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아니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만들어본 사람이라면 겪었던 혼란과 어려움이다. 특히 악어노트의 일기는 라즈가 대학생활을 하는 4년 동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으로서 겪을 수 있는, 청소년과 비 청소년의 경계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혼돈을 읽을 수 있다.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등의 문학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인간 존재의 고독함과 상실감과 매우 닮아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책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이외에도 다자이 오사무, 또 인간 존재의 실존에 대해서 고민해 후에 실존주의 희곡에 영향을 끼친 장 주네의 이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이 소설이 인간의 실존과 고독함 등 보편적인 성질과 감정을 다루고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라고 해석된다. 더불어 이와 같은 점 때문에 스스로를 퀴어라고 정체화하지 않은 독자들이 이 소설을 접했을 때도 라즈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무엇보다 악어노트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라즈가 -퀴어로서 받는 차별과 혼란에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책을 덮는 그 순 라즈의 모습은 이 세상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새로운 주체의 형상으로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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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우리와 다른 듯 절대 다르지 않은 리즈의 이야기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이번 여름 사랑을, 우정을, 세상을 그리고 인간을 보다 이해하고 싶다면 이 노트를 펼쳐 보는 것은 어떨까.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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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도미닉
    • 맺음말이 인상깊었어요! 감사합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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