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 - 필로 FILO No.8

글 입력 2019.07.0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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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

FILO

 

No.8

May.Jun

2019



사실 <FILO>를 보기 전에 조금 긴장한다.


표지를 걷어 이번 호에 실린 글의 목차를 쭉 훑으며 과연 나는 이 중 몇 편의 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과연 이번 호에서 다루는 영화 중 몇 편의 영화를 보았나 되짚어 보는 것이다. 평론이란 어쩔 수 없이 그것이 평하고자 하는 대상에 의존적(일면 기생적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이다.


영화, 글, 그림, 노래 등. 작품 자체를 접하지 않고서 평론만 읽는 일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친구와의 대화처럼 약간은 피곤하고 금방 딴짓을 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도 맛깔나게 하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고 그 친구 덕분에 새로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무궁무진하게 펼쳐나가기도 한다.


과연 그는 누구란 말인가. 과연 이 영화는 어떤 영화란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FILO>를 읽으려 치면 습과적으로 느끼던 은근한 긴장감 대신, 어떤 영화가 누군가를 통과해 다시 어떤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달되고자 하는지, 막연한 설렘이면 충분할 것이다. 곧 영화의 제목을 검색하고 다운로드하는 나를 마주친다. 새로운 세계로 지평이 확장되는 순간이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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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이자 언제나 창의적인
비주얼 아티스트인 아녜스 바르다는
누벨바그의 현대성과 페미니즘의 추진력,
엄격하고도 즐거운 독립성의 개념을 상징하리라.


 

이번 <FILO>에는 익숙한 제목과 이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아녜스 바르다, 그의 이름은 지나칠 수 없었다. 아녜스 바르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미지가 환기된다.


아녜스 바르다의 부고 소식에 많은 사람이 억지로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을 느꼈던 거 같다. 그가 우리에게 허락했던 세계의 특별한 경험과 창의적 감각들이 너무나 또렷하기에, 그만큼 우리는 너무나 놀랐다. 그와 함께했던 영화인들은 이미 이곳을 떠났다 해도, 그의 나이가 아흔에 이르렀다 해도, 그는 우리와 언제까지고 함께 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바르다의 오랜 친구인 장미셸 프로동의 애도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니다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향년 90세의 아녜스 바르다는 오랫동안 지병을 앓았지만 그 사실로 인해 이 상황이 납득되는 것은 아니다. 아녜스, 죽음은 당신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군요.”


 

죽음, 그러니까 그 끝도 시작도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은 아녜스 바르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장미셸 프로동의 글은 바르다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가 어떤 영화들을 지치지 않고 만들었는지, 누벨바그의 대모로서 어떤 업적을 이뤄냈는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그가 영화를 매체로 어떤 창조적 실험을 반복했는지 기록한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그가 단단하게 구축한 세계관에 대해 말한다. ‘바르다는 결코 정치적 쟁점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감정과 놀이의 모티프를 무한히 변주’하였으며 ‘그의 삶을 수놓은 인연들과 놀라운 사건들 속에서, 삶에 대한 탐미를 발견’한다. 그는 독립적으로 창의적, 창조적으로 세계를 매력적으로 관찰해 표현해냈으며, 그의 서사는 언제는 주제를 잃지 않았고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았다.

 


“타자들, 장소들, 불빛들, 위대한 작품들, 스쳐지나가는 낯선 사람들과 조우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의 영화들을 연결지음으로써 바르다는 자신의 영화적 삶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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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석의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와 이시이 유야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두 편의 영화를 아우르는 통찰이 담긴 ‘두 개의 장면, 실력의 정체’ 글은 흥미로웠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두 편의 일본 영화는 비슷한 장면들을 통해 서사를 풀어내거나 종결짓는다.


각각의 장면들은 각 영화 안에서 어떤 의미를 표상하며 두 편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 연계되거나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가. 그 연계 또는 차이는 또다시 어떤 의미로 확장될까. 우리는 두 편의 영화를 나란히 놓고 관찰한 정한석의 한 편의 글을 통해 영화가 영화적 사태를 구체적으로 담지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

 

카세료가 배우 기주봉에 대해 쓴 글은 배우의 배우에 대한 단상이지만, 내게는 그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된다.

 


“배우는 카메라와 스태프들 앞에서 혼자일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보다 온 세상 가운데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힘든 일이다. 기주봉씨를 보고 있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온 세상 가운데 자기 홀로 존재할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힘든 일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사로잡힌다.


세계는 내가 그것을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 우리가 세계와 어떤 식으로 관계 맺는지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무너지고 재건된다. 우리는 세계와 그 세계속 인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떤 동질감 또는 환상을 감각한다. 그리고 무사히 그 세계로부터 빠져나온다. 안전하게. 영화가 끝나며 그로부터 오롯이 빠져나오는 나라는 한 사람은 어쩐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다르게 감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차이에 힘입어 나는 어쩌면 이 세계에서도 좀 더 의젓하고 태연하게 홀로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하나의 세계를 목격한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보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세계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별개로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생성되는 세계를 건설하며 나는 나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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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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