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기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과정, ‘죽음’ [도서]

톨스토이의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글 입력 2019.07.07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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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죽음의 문제


 

톨스토이 문학의 중심은 ‘삶과 죽음’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접했던 「전쟁과 평화」에서도, 톨스토이는 전장이라는 배경을 통해 인간이 삶의 불완전함을 느끼고 죽음을 인지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두 작품 간의 차이점이라면 「전쟁과 평화」에서는 죽음보다는 삶이라는 소재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삶보다는 죽음이라는 소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한 인간이 죽음에 다다르는 서사 및 심리적인 과정이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죽음의 소재는 단지 사건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으로 이어진다.

 

톨스토이는 판사직에서 일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반 일리치 글로빈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그의 생애를 통해 죽음에 관한 타인의 보편적인 시각과 죽음에 가까워져갈 때 인간이 거치게 되는 심리의 변화 단계를 유기적으로 그려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음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들에게 삶과 죽음의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그의 물음은ㅡ예컨대 죽음은 타인의 것이 아니며 ‘나’는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ㅡ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과연 이반 일리치를 ‘동정’ 혹은 ‘연민’으로 대우할 수 있을지, 자신의 인생은 과연 이반 일리치의 그것과는 다르게 무언가 더 ‘괜찮을’ 수 있을지 성찰하게 만든다. 이렇듯 작품 내에 존재하는 인물만이 아닌 작품 내부와 작품 외부의 모든 존재들을 포괄하는 맥락으로서 삶과 죽음이 언급된다는 것이 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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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의 초상화.

러시아 갔을 때 어떤 미술관에선가 봤는데.

트레치야콥스카야 미술관이었을 것 같다.


 

 

2. 타인을 타인으로 대할 뿐인 방관자들에 관하여


 

먼저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반 일리치와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이다. 주변인과 이반의 관계는 삶과 죽음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장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에게는 가정이 있고, 자신의 직장에서 만난 좋은 동료들도 있다. 표면적으로 이들과의 관계는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상을 파헤쳐보면 관계만 존재할 뿐, 이반 일리치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그를 단지 완전한 ‘타인’으로 대우할 뿐이다.

 

작품의 초반부에서도 드러나듯 이반의 직장 동료이자 오래된 친구인 뾰뜨르 이바노비치는 이반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의 죽음으로 자신 혹은 처남이 어떤 보직으로 승진하게 될 지를 생각하며 죽음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것에 안도한다. 이반의 아내인 쁘라스꼬비야 표도르브나는 죽음에 다다르는 남편을 자신의 체면과 품위를 드높이기 위한 대상으로 대우한다. 자신을 ‘병이 든 남편을 보살펴주고, 남편의 히스테리를 인내하는 관용의 여인’으로 타인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녀는 ‘형식적으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뿐이고,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과시하는 듯한 태도도 보인다. 이반의 자녀들도 아버지를 그저 불편한 존재로, 집안의 공기를 무겁게 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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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콥스끼-삐리울록! 끄리바깔리엔느이-삐리울록!

나르마디엔뜨... 찌엔뜨르.... 끌리니까 찌엔뜨랄나야

이제 러시아어 배울 일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좀 아쉽다.


  

이렇듯 이반은 주변인에게서 타인으로 취급받고, 그가 죽음을 감지하고 죽음에 이르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서 그의 죽음은 방관의 대상이 된다. 그가 아무리 눈앞에 닥친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내적인 불안에 시달려도 그를 실질적으로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사람들은 이반의 병세가 심해진 것일 뿐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광경은 삶과 죽음의 ‘자기중심성’을 강화한다. 개인은 자기 자신을 위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구성되고 자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타인의 인생과 죽음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인생만 생각한다. 아무리 타인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자신에게 그것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에게 그러한 최후의 순간이 다가올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거나 생각을 해도 이내 가볍게 잊어버리곤 한다. 이런 상태에서 죽음을 몸소 체험할 때 개인의 자기중심적 세계관은 흔들린다.

 

이반의 경우도 그렇다. 그 역시도 다가오는 죽음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앞서 언급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주변인에게 무심했고, 그저 자신의 출세를 고민하는 데에만 몰두했으나ㅡ죽음의 단계에 진입하면서 자신의 세계관이 붕괴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하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달라진 것은 없다. 그들은 이반처럼 죽음을 마주한 일도 없기에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이와 같이 주변 인물들, ‘방관자들’을 등장시키며 톨스토이는 겪기 전까지는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인생관을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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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마... 어디였더라,
어쨌든 모스크바 도심 한복판이다.
이때 길 많이 헤맸었지.


 

3. ‘죽음’ - 타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탈피


 


“분명 카이사르는 인간이었고 따라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 나 바냐, 이렇게 나만의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 나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 책의 72쪽 중에서.


 

이반은 자신이 죽음에 다다르고 있음을 깨닫고 끝없는 절망에 빠진다. 그는 죽음의 단계에 진입함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이 해체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 장면에서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나기 시작한다.


평생을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왔고, 살아오는 데 있어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판사로서의 품위를 지킬 정도로는 살아올 수 있었던 이반 일리치에게ㅡ갑작스레 닥친 죽음은 암흑과도 같았을 것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그가 누린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에게 허망함과 절망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나온 삶에 관한 성찰, 그만이 존재했던 세계에서 벗어나오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초기의 단계에서 ‘지난날의 기쁜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음의 목소리는 그에게 그 시절의 삶이 과연 진정으로 기뻤냐고 묻는다. 물음을 들은 이후 이반은 자신이 법률학교에 입학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의 삶을 회고하고, 그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삶이 사실은 삶의 즐겁고 기쁜 조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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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슼-흐바의 드넓은-하늘.


“「사는 거라고? 어떻게 사는 거 말이냐?」 영혼의 목소리가 물었다. / 「전에 살던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지, 기쁘고 즐겁게.」 / 「전에 어떻게 살았었는데?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나?」 영혼의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그는 기억 속에서 이전에 즐거웠던 삶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에 좋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 책의 101쪽과 102쪽에서.


 

법률학교에서 그는 우수한 학생이었을 것이고, 만족스러운 유년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또한 죽음을 목도하기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고위 판사직에까지 승진하였으므로 그렇게 원하던 명예와 적당한 부까지도 손에 넣었다. 분명히 그에게 만족스러운 삶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삶이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고 깨닫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너무도 충실하게 ‘타인의 거울에 비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만의 세계에 갇혀 그가 주체가 되는 삶이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훌륭하다고 생각할 법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외적으로 비추어지는 성공과 외적인 자아실현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이때 ‘외적인’ 것들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설립한 것이다. 개인이 이렇게 외적인 명예를 추구하며 살아가면서 그 혹은 그녀 자신은, ‘나’를 위한 삶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기초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이반 일리치 역시 계속해서 상류층의 기조를 따라 살아가려는 태도와 ‘고위 판사’라는 사회적 지위에 입각하여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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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고등경제 대학교의 풍경.


“하지만 법원 동료인 셰베끄 판사가 찾아오자 울며 동정을 구하는 대신 이반 일리치는 심각하고엄하게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타성적으로 대법원 판결의 의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하고는 거듭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다.”


- 책의 85쪽 중에서.


 

그가 고위 판사직에서 일하기를 소망했던 것 역시, 당시 상류층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고상한 품위’를 유지해 자아의 실현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에게 인생이 주어진 최초의 시점부터 이 모든 기준들이 이미 세워진 상태였으므로, 그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는 타인이 만들어놓은 일반적, 혹은 보편적인 성공의 기준을 따라가며 자신이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에서 삶의 완전함을 향한 지향은 균열을 빚고 삶의 이면에 타인으로 인한 불완전함이 존재함을 목도한다.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서, 자기중심적인 사고 체계 안에서 타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아가기에 바빴던 이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지난 삶의 허위를 직시한다. 톨스토이는 이렇듯 ‘자신만이 있는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계기’를 죽음으로 설정하고, 죽음의 의미가 타인의 거울에 비추어 기계적으로 살아온 개인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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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허위’라는 족쇄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죽음.


 

끝내 이반 일리치는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일반적인 소설에서 병으로 줄곧 고통 받다가 사망하는 결말은, 안타깝고 어두운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작중의 이반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자신이 죽음에 이르고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으므로, 작품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반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나는 저렇게까지 절망적인 최후를 맞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작품의 등장인물 역시 이반의 죽음을 잠시 동정하고 잠시 되새길 정도로만 여긴다.

 


“그리고 이날 아침 시종과 아내, 그리고 딸과 의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날 밤 깨달은 끔찍한 진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 책의 112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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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죽기 전, 자신을 둘러싼 가족들과 주치의를 바라보며 그들의 삶 역시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진실을 목도한다. 나에게는 죽음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나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이 삶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타인을 단지 타인으로만 여기는 동시에 타인이 정한 사회의 기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모순.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은 여전히 그 허위에 파묻힌 채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해서 살아간다. 명예와 권력, 부,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도덕적인’ 행위 같은 것들에 집착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반은 자신의 삶에 존재했던 허위, 타인의 시선에 얽매였던 시절의 허망함을 깨닫고 죽음을 맞이했다. 비록 그가 살아온 인생을 주체적인 삶의 형상이라 옹호할 수도, 그를 하나의 영웅상으로 묘사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죽음은 삶의 허위와 모순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와 동시에, 죽음으로써 그를 평생 동안 옭아매었던 허위로부터 비로소 이반은 해방된다. 톨스토이는 그의 해방을 축복하고자, 그리고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공을 인정하여 존엄하게 대해주고자, 작품의 제목을 단지 ‘이반의 죽음’이 아닌,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지은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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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실 난 톨스토이의 장편선은

진짜.. 좀 힘들다.

최소 20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해서.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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