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썰썰] 너의 목소리가 보여

나의 편협함은 지독하다.
글 입력 2019.07.06 23:27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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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여느 때처럼 평범히 흘러가던 하루. 손님을 맞고 물건을 팔고. 그런 하루였다. 오만가지 유형의 손님들이 오가며 카운터에 서 있는 내 시선을 끌었다. 그러던 찰나 하얀 마스크를 쓴 한 남자가 큰 몸짓으로 일행을 불렀다. 한창 바쁜 시간에 매장 입구에서 크게 팔을 휘두르는 모습은 가뜩이나 일이 하기 싫어 온갖 데에 성질이 나던 내 신경을 긁었다. 아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야. 시선 끄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관종인가.'

얼마 후 한 남자가 벽장에 진열된 컵을 사고 싶다고 했다. 누구도 찾지 않았기에 나는 그 컵이 어느 브랜드인지,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심지어 재고가 있는지도 몰라 허둥댔다. 아 귀찮게. 자주 팔던 제품이 아닌 신경도 쓰지 않던 컵을 달라는 말에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잔뜩 쌓인 먼지를 보고도, 6만원이라고 잘못 쓰인 가격표를 보고도 그는 그 컵을 사겠다 했다. 그 다짐이 완강했다. 나는 곧 그에게 재고가 없다는 말을 전했다.

“죄송하지만, 이건 재고가 없어요.” 하얀색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에서 일렁이는 당황을 읽고 나도 덩달아 당황했다. 재고가 없다는 말에 당황한 게 아니라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해서. 아, 외국인인가 보다. 나는 곧이어 짧은 영어로 응대를 시작했으나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그와 나 사이에 당혹한 공기가 퍼지고, 그는 멀리 있던 일행을 손짓으로 불렀다. 그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저 큰 몸짓과 흰 마스크. 아까 내 신경을 거슬렀던 사람.

그의 친구들이 우리가 서 있던 곳까지 왔고 그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딘가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길래 외국인이라는 생각에 이번에도 영어로 말했다. “This is out of stock.”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더라. 내 영어 발음이 그렇게 구린가? 외국인이 절반인 매장에서 콩글리시로 지금껏 잘만 응대를 해왔는데. 그러다 깨달았다.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다만 농인이었을 뿐. 어눌한 발음과 그들끼리 주고받던 커다란 손짓. 청각에 장애가 있어 소리로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그랬던 거였다. 그것을 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는 그들에게 큰 실례를 저질렀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국인이 아닐 거라 속단한 것은 정말 편협한 판단이었다.

당황함과 미안함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그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표정 관리를 하자, 였다. 여차저차 그 컵을 결제할 때까지도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 비해 소리가 잘 들리는 청인이란 이유로 섣불리 미안함을 내비치는 게 내 마음은 편하겠지만, 그들은 동정으로 느낄 것 같아서. 미안함은 내 안에서 해결해야 할 자기반성이었다.

미안함과 자책으로 뒤섞인 마음은 그들이 매장을 나가고 나서도 계속됐다. 자괴감. 그래, 자괴감이 내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겠다.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이었나. 이로써 나는 그들에게 상처를 준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었구나. 어쩌면 나는 여태껏 사람을 일반인, 비일반인 두 분류로 나누었던 건 아닐까. 일반인은 길가에 널린 ‘멀쩡한’ 외형을 가진 사람일 것이고, 비일반인은 그것과는 다른 어떤 ‘특이함’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의식 속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그들을 멋대로 판단하고 외국인이라는 항목을 추가했다. 부끄럽게도 내 인식엔 장애인이라는 표본, 선택지, 가정이 아예 없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 외국인이라는 공식이 박혀있었고 장애인이라는 일말의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 내가 가진 편견은 지독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편견에 휩싸이나. 의식하지 못하고 던진 말 때문에 언제나 약자만 상처받는다. 내 평생 그들이 받는 상처를 알기는 할까. 너무 미안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농인’을 검색했다. 사실 농인이란 단어의 정확한 뜻도 모르고 있었다.

농인은 청각에 장애를 가진 이들을 통칭하는 말로, 잘 듣지 못하는 경우(청각장애인)나 언어구사가 불가하거나 힘든 경우(언어장애인)를 통틀어 의미한다. 전체 농인 중 80.3%는 수어를 사용하며 수어는 농인들의 문화를 담은 시각 언어이다. 농인 중 일부는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독순을 사용할 수도 있으나 모든 농인이 입술의 움직임을 파악할 순 없기에 주의해야 한다. 내가 어릴 적에는 ‘청각장애인’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요즘은 ‘농인’이라고 주로 쓰인다고 한다. 청각장애인이라는 말이 장애를 강조하는 어감이 강하다면, 농인은 소수집단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농인보다 비교적 청각에 손실이 없는 이들은 '청인'이라고 부른다. 일반인, 정상인이라는 말은 무례한 것이니 삼가해야 한다.

아주 간단한 기본 지식만을 공부했는데도 나는 지금껏 내가 얼마나 무심했는지 느꼈다. 장애는 나와 다른 세상이란 생각에 찾아볼 노력도 하지 않은 과거의 나 때문에 훗날의 나는 큰 실례를 범했다. 당연히 의식하고 살아야 할 것을 의식의 반열에도 올리지 않은 나의 오만이 고개를 들 수 없이 창피하다. 그러다 유럽여행을 갔다 온 지인이 당한 인종차별, 예컨대 대뜸 “칭챙총", "니하오”거리며 아시아인을 싸잡아 조롱하는 것에 열을 냈던 내가 과연 그들을 욕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들보다 더 무지했고 무례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기준을 세우고 그 커다란 벽을 공고히 쌓아 올려 종국에는 그런 경계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이건 깊은 반성에서 시작한 사죄의 글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 태도를 수정하고 내가 관심두지 않았던 것들을 공부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부디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농인들이 일상으로 받는 상처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영상을 첨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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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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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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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NOSAUR
    • 재이님 저 역시 편견에 휩싸인 한 사람으로서 함께 반성하게 된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죄의 글이라 하셨지만 다시 되돌아 생각해보는 재이님은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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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
    • 2019.07.09 11: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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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DINOSAUR아직 갈길이 멀다는 걸 항상 느낍니다. 댓글을 보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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