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옥상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 [도서]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고
글 입력 2019.07.07 19:4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든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다면

좋다고도 생각해.


- 옥상에서 만나요, 효진 中



[크기변환]xxlarge.jpg
 


정세랑의 단편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2018)』은 참신하면서도 저항적이다. 우선 참신함은 이야기의 소재와 표현 방식에서 잘 묻어난다. 귀에서 과자가 자라나는 외국인 남자, '규중조녀비서'라는 책으로 반려자를 찾으려 드는 여자, 헌혈 담당자를 통해 피를 공급받으며 사는 벰파이어 여자까지. 언뜻 장르문학에서 볼 수 있는 참신성은 이야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녹아든다. 그 간극을 적절히 조절하는 정세랑만의 스타일일 테다.


저항심은 이야기의 주제에서 드러난다. 소설은 주로 여성을 둘러싼 젠더 폭력성을 다룬다. 그러나 이 폭력성이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가해진다고 말하진 않는다. 남성도 젠더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래서 소설은 남성과 여성을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젠더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대상으로 본다. 나오는 단편 중 일부를 살펴보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 같다.


*


「웨딩드레스 44」는 한 웨딩드레스를 거쳐간 4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때, 웨딩드레스를 소재로 옴니머스 형식의 이야기를 담는 시도는 꽤 흥미롭다. 소설이 보여주는 결혼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기쁜 행사는 아니다. 여섯 번째 여자는 타투로 인해 결혼식 직전까지도 반려자가 될 사람과 다툰다. 열 두 번째 여자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하고 싶지 않은 다이아 반지를 맞춘다.

결혼은 연애와는 달리 법적으로 관계를 승인받는 제도다. 이때, 제도가 쉽게 바뀌진 않는다. 바뀌어가는 시대상을 유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열세번째 여자의 사촌언니는 결혼을 앞둔 사촌에게 이렇게 말한다. "결혼생활 안에서 너를 변호해줄 사람은 없어. 너밖에 없어." 열다섯번째 여자의 말도 핵심은 비슷하다.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소설은 결혼이란 제도로 인해 남아있는 젠더 폭력성을 꼬집는다. 전통적으로 답습됐기에 당연스레 생각된 것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제대로 먹는다면,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고민을 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열입곱번째 여자가 애주가인 남자와 결혼해 서로의 술친구로 살아가는 모습이 대표적이겠다. 결혼 생활에서 서로의 온기만 있다면 충분하다는 스물두번째 연인도 마찬가지이다.


*


「효진」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인격 모독에 가까운 사건을 지인들에게 겪은 효진의 삶을 다뤘다. 효도하라는 뜻이 있는 '효진'이라는 이름을 그녀는 부정하려 노력한다. 효진은 오빠의 도움으로 강압적인 아버지와 실랑이 끝에 대학을 간다. 대학을 가선, 분수에 맞게 학교를 그만 다니고 어머니 병수발을 들라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선 하고 있던 연구원 일을 포기하고 제과학교를 다니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

효진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자신이 겪는 부조리를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힘든 사건들로부터 '도망'을 나온다. 하지만 그게 도망이라면 '멋진' 도망에 가깝겠다.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곳으로 향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중국인 남자친구를 사귀는 모습은 그녀가 한국에서 겪을 법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인상을 준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소설은 건넨다. 효진이 도쿄에서 "얼굴 좀 괜찮아졌지?"라고 말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한국적'이기 때문에 '폭력적'일수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났다. 새로운 곳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간다. 그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표현이 딱 적확하겠다.


*


「알다시피, 은열」은 '은열'이라고 하는 가상 역사 인물의 일대기를 현재와 연결지어 바라본다. 역사학도인 정효는 자신의 논문 주제로 『청도문집』을 살펴보면서 은열이란 존재를 알게 된다. 비록 논문이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정효는 은열을 다음과 같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은열은 유구한 혁명정신의 계승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여성 영웅에 아나키스트였다고. 은열들의 독특한 범아시아적 우정을 재현하는 게 우리 세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 옥상에서 만나요 ; 알다시피, 은열 中



정효는 자신이 속한 다국적밴드 '알다시피'에서 은열의 이상향을 실현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정효는 '은열'이라는 존재를 건져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을법한 사실을 발굴해낸 셈이다. 존재는 의미를 부여할 때 보다 확실해진다. 정효가 인디밴드 써바이벌 프로그램에서 6등을 하고 "역사학자가 될 겁니다"라고 바로 인터뷰한 건 같은 맥락이겠다.




원종환.jpg
 

[원종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