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원한 유년의 우울 [도서]

글 입력 2019.07.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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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무 살 무렵의 나는 자신을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법한 책을 뒤적여보고 책상 앞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해봤지만, 그곳에서 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작년 가을에 무작정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때 가져갔던 책이 『잎 속의 검은 잎』이었다. 홀로 걷는 낯선 땅 위에서 나는 기형도의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문장에 의지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무력함과 슬픔을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미숙함이 불러오는, 엄청난 열정을 동반하는 치기를 동경하기도 했다. 이렇듯 처절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어낸 문장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삶의 이력이 그의 내면세계를 이토록 흔들어 놓았는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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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성인이 된 현재까지도 그때의 기억은 끊임없이 영향을 끼친다. 자전적 작품은 작가의 삶이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한다. 내적 울림을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에게도 유년의 기억은 시 창작의 원동력이자 모티브로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위험한 家系∙1969」와 「엄마 걱정」을 통해 시적 형상화가 된 작가의 유년 체험을 살펴보고자 했다.



뒤틀리고 왜곡된 유년, 「위험한 家系∙1969」


누구나 지울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상처가 존재할 것이다. 그 상처는 성인이 되어도 트라우마로 남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곤 한다. 이 작품에서도 기형도 시인의 유년 시절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기형도에게 상처는 어떤 것일까? “유년/소년 시절의 그의 상처는 가난이며, 젊은 날의 그의 상처는 이별” (p.137)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풍병으로 쓰러져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고, 어머니와 누이가 생계를 위해 일터에 뛰어든다. 화자는 월말고사 성적이 좋아 상장을 받아오지만, 현실 속에서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집에 가서 상장을 자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장으로 종이배를 만들어 개천에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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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나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후략)"

-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잎』, 「위험한 家系∙1969」, 문학과지성사, 1989, 87-88쪽.


“모두 다 꽃씨들을 가지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p.88)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작은 씨앗은 ‘자신’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시적 화자가 처한 가난의 상황 속에서 훗날 큰 꽃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리며 막막함 내지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모두 다 꽃씨를 갖고 있지만 유독 나의 씨앗만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상장이 무의미해질 만큼 직접적인 생계의 위협을 받는 이의 초조함과 불안함이 크게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중략)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 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장을 돌리겠다는 말이냐?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잎』, 「위험한 家系∙1969」, 문학과지성사, 1989, 88쪽.


또한 그는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p.88)고 하며 무서움을 느낀다. 하지만 그에게 정말 무서운 건 가난한 아버지와 위태로운 어머니이다. 이를 과장되지 않은 담담한 어조로 표현함으로써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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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것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그의 유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뒤틀리고 왜곡된 것처럼 표현한다. 무기력하고 슬플 때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수록 내 탓인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다정한 칭찬조차 주고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온 화자의 불안감이 청년기에 쓴 작품에서까지 나타나게 된다.



부정성의 흔적, 「엄마 걱정」


작품 속 시적 화자는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홀로 기다린다. 혼자 남은 ‘나’는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천천히 숙제를 하지만, 엄마의 발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어두운 방에서 무서워진 나는 울음을 터트리는데, 먼 옛날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기다리던 그 마음은 여전히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유년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무를 팔러 간 어머니를 배고픈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어조는 서정적이다. 1연에서는 엄마를 기다리는 화자의 불안한 마음과 그리움의 정서가 형상화되어 있으며, 2연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애틋한 마음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현재의 ‘나’에게 설명하고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잎 속의 검은 잎』, 「엄마 걱정」, 문학과지성사, 1989, 134쪽.


이 작품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상황과 정서를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아이를 통해 어머니를 기다리는 외롭고 두려운 심경이 형상화된다. “해는 시든지 오래”, “찬밥처럼” “배추 잎 같은 발소리”(p.134)와 같은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엄마의 고된 삶과 ‘나’의 외로움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동시에 체계적인 은유로 나타난다. 시 전체가 “열무 삼십 단을 이고”(p.134) 간 엄마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생계를 위해 나간 엄마에 대한 아들의 걱정이 시에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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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기억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나 또한 시적 화자처럼 부모님의 삶을 붙들면서 마음 아파했던 시간이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생계의 어려움, 삶의 아픔을 함께 보듬어 볼 수 없었던 걸까. 서로에게서 소외된,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는”(p.134) 것 말고 유년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을까. 당시에는 무서움과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나, 커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이는 기억들이 있다. 하지만 부정성의 흔적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외로움, 빈방 등 여전히 깊숙한 심연에 자리하고 있다.





영원한 유년의 우울


시인은 화자를 내세워 전언을 만들지 않는다. 특별한 시어와 시행들이 모여서 전언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전언이 만들어지는 동시에 주체가 생겨난다. 하지만 기형도의 『잎 속의 검은 잎』처럼 시적 화자와 작가의 삶이 일치할 때도 있다. 이는 독자들에게 작가와 작품에 대한 신뢰를 준다.

동시에 기형도는 개인적, 내적 상처를 반성하고 분석하여 그것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유년의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과 정신적 외로움은 어린 그에게 상처로 남아있지만, 이를 통해 작품은 그 시간 속에 영원히 멈춰 위안과 감동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때로는 그의 시에 의지하고, 때로는 내면이 흔들리면서 자라왔던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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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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