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영화]

차라리 꿈이라면 좋을 이야기
글 입력 2019.07.13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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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적에,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를 읽었다. 앨리스는 시계를 들고 다니는 토끼를 쫓다 깊은 구덩이에 빠지고,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된다. 앨리스는 시계 토끼를 따라가기 위해 병에 든 음료를 마셨다가 몸이 작아지기도, 컵케이크를 먹고 커지기도 한다.


엉겁결에 만난 이상한 여왕과 함께 크로켓을 치다 재판을 받게 되는데, 결국 모든 건 앨리스의 꿈이었다는 결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어린 나에게 이 이야기의 전개는 너무나 어지러웠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이 동화를 ‘정신 없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

이 글에는 줄거리를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죽이는 거 이해해주세요. 전 그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에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은 화를 내지 않는다. 아니 마치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처음으로 취직한 공장에서 모욕을 당해도, 열심히 뛰어다니며 서명 받은 개발 찬성 서명지가 찢어도, 형석에게 감금되어 다리미 고문을 당해도 수남은 그저 쭈그려 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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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도철의 죽음은 분명히 의도하지 않은 사고였다. 그 후 형석에게 붙잡힌 수남은 세탁기에 갇혀 말 그대로 깨끗하게 세탁 당한다. 세탁기에서 꺼내진 수남은 형석을 죽인다. 자신을 신고하려 한 형석을 막기 위한 자기방어적인 두 번째 살인이었다.


나는 세탁기 배수관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마치 그녀로부터 씻겨내려진 순수함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수남은 선로를 이탈한 폭주기관차 마냥 길을 잃고 질주한다. 마침내 ‘화’가 폭발한 것이다.


재개발 반대 시위를 지위하는 경숙 때문에 재개발 확정이 힘들다는 공무원의 말은 수남을 움직인다. 수남은 일하고 있던 복어 집에서 복어의 독을 발라와 경숙을 독살한다. 철저히 계획된 세 번째 살인이었다. 연이은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은 수남을 용의자로 의심하고, 그녀를 찾아간다. 수남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횡설수설하자, 한 형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수남을 다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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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자꾸 거짓말하면 안 돼요. 재개발 그거 제가 못하게 할 수도 있어요."


수남은 칼로 형사의 목을 그어버린다. 형사 둘을 죽이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울면서 웃는다. 오랫동안 수남에게 켜켜이 쌓여있던 울분을 토해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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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수남이다. 수남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이상하다. 몸이 부서져라 성실하게 살지만 그녀는 행복해지지 못한다. 오히려 행복을 방해하는 사람들만 자꾸 나타난다.


해안가 도로를 달리는 수남을 보며, 나는 차라리 수남이 잠에서 깨어나 ‘사실은 모든 게 꿈이었네’라고 해주길 바랬지만, 영화는 그렇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끝이 난다. 행복을 쫓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결국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그곳에 갇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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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잔혹동화의 주인공 같은 수남의 이야기는 우리와 그리 멀지 않다. 사실은 우리도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다. 대학이라는 관문을 지나가기 위해 우리는 ‘학자금 대출’이라는 이름의 음료수를 마신다. 그리고 취업에 필요한 스펙 때문에 ‘대출’이라는 이름의 컵케이크도 먹는다. 빚 없인 아무것도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학자금과 대출금과 이자를 모두 갚기 위해 평균 4년이 걸린다는데, 취업에 성공해도 몇 년간은 대출 빚을 갚아나가야 한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지만, 학자금 대출을 청산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결국 수남과 같은 현실이다. 내 집을 마련하려면 한 가구가 받은 월급을 하나도 안 쓰고 다 모아도 11년이 걸린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2017년 우리나라를 뒤흔든 YOLO(You Only Live Once,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 열풍을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맞닥뜨린 현 젊은 세대의 대응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0년을 몸이 빠지도록 일했지만, 꾸준히 오르는 집값 때문에 결국 1억 4천 만원을 대출받는 수남은 우리의 가깝고도 쓰디쓴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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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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