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왜, 아직도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가? [도서]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옮김, 경세원 2016
글 입력 2019.07.13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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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나이 43세에 자신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을 글로 옮긴 저서이다. 1부부터 9부까지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출생(354년)부터 자신의 어머니 모니카의 죽음(387년)까지의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 10-13권은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사변적 통찰들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고백록에 관한 서평을 쓰겠다고 생각을 하고 읽으면서 스스로 가장 많이 마주했던 질문은 ‘왜 지금, 우리(나)는 고백록이라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이었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에게 고백록이라는 책이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나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도 아니었기에 종교적 동기를 그 답변으로 제기할 수도 없었다.


거의 2000년전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한 그리스도교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고백한 내용을 왜 비그리스도교인이자 현대인이고,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가 읽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성공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독서 활동이 의미 있다고 주장 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고백록』이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1. 고백의 성격과 목적


 

기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의 목적은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다. 『고백록』의 첫 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찬미와 찬양으로 시작한다. “주님, 당신께서는 위대하시고 크게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인간, 당신 창조계의 한 몫이 당신을 찬미코자 합니다.”(1.1.1) 시작부터 이 열 세권의 방대한 분량의 자기 고백이 무엇을 위하여 이루어지는지 선언하는 구절이다. 이어지는 장의 구절들에서도 자신의 고백의 목표가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이 들어난다. “저의 하느님, 지금껏 당신께서 엎어뜨리시거나 때려 분질러놓으신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면야 저를 비웃어도 좋습니다. 그래도 당신 찬양이 되기 위하여 제 부끄러운 짓들을 당신께 고백하겠습니다.” (4.11). “당신의 자비를 두고 당신께 드리는 찬미를 그치지도 않고 입 다물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생물들도, 물체들도, 그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서 찬미를 그치지 않게 해주십시오.”(5.1.1).


그러나 이런 구절들에 단순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의도만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동시에 자신의 죄악들을 고백하고 있다. “저의 선업을 두고는 안도의 한숨을 저의 악업을 두고는 탄식의 한숨을 쉬면 좋겠습니다. 저의 선업은 당신의 업적이자 당신의 선물이며, 저의 악업은 저의 죄악이자 당신의 심판입니다.”(10.4.5) , 하느님을 찬미함과 동시에 자신의 죄악 또한 고백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고백과,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는 죄의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고백이 정확하게 분리되어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죄의 고백을 통하여 무한한 은총을 통해 자신을 용서하시며 죄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 대한 찬미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고백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의 눈 앞에서 “인간 양심의 심연까지도 벌거벗기”(10.2.2)에 그가 고백을 함으로써 주님께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을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고백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주님, 저 역시 사람들이 들으라고 당신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10.2.2). 사람들에게 고백을 함으로써 그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아들들의 귀에 대고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 기쁨을 나누는 동료요, … 이들을 섬기라고 제게 명하셨습니다.”(10.4.6) 그는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신앙을 가진 같은 동료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고,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함을 목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처음 서론에서 제기했던 문제를 상기해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이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면,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자신의 고백이 종교적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는 먹혀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형제 같은 마음이 이루어내야지 남남의 마음이어서는 안되고 남의 자식들의 마음이어서도 안됩니다.”(10.4.5) 도대체 우리는 왜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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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있는 낙산 공원의 사진.
성벽과 가로등의 불빛만 있어도,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 있다니.
놀랍다. 놀라워.



2.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


『고백록』에서 서술되는 그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에 정착하기 까지 그는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철학의 차원, 즉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는, 그러나 굉장히 설득력 있고 반박하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의 철학적 사고들을 극복하는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들이 옳다고 느껴지는 와중에도 그를 자꾸만 그것들과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다양한 욕구들을 극복하는 것 또한 그가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 위해 넘어야 할 난관이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생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철학의 차원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탐구에 대한 갈망은 키케로의 저술 『호르텐시우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키케로의 책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 그의 마음은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는 욕구로 믿기지 않을만큼 헐떡이기”(3.4.7)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불타는 마음을 채워주기 충분한 서적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입구는 나지막하고 갈수록 드높아지면서 신비로 가려진 무엇이었고, 막상 나로 말하자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거나 그 걸음에 모가지를 숙일 모양새가 아니었습니다.”(3.5.9). 결국 그가 처음으로 선택한 철학적 입장은 그리스도교의 것이 아니라 마니교의 것이었다.


마니교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던 이유는, 어릴 때부터 그를 괴롭혀 오던 악의 문제에 대해서 괜찮은 답변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니교는 선과 악 모두 존재하는 실체이고, 인간 또한 역시 선하고 악한 의지를 갖고 태어난다는 선과 악의 이원론을 교설로 제시했다. 이 답변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신의 악행에 대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추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죄를 짓는 것은 저희 자신이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저희 안에 있는 다른 본성이 죄를 짓는 것으로 보였고….”(5.10.18).


그러나 얼마 안 가 마니교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마니교도들의 답변이 어리석어 보이기 시작했고(5.11.21), 결정적으로 마니교의 유명한 교설자 파우스투스마저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의 고백을 인용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가 학예에 조예가 깊으리라고 생각해오던 저로서는 그가 학예에 소양이 없다는 사실이 저한테 제대로 드러난 후로는, 여태껏 저를 괴롭히던 문제들을 털어놓겠다는 일도, 그것을 해소해 주리라던 일도 절망하기 사작했습니다.”(5.7.12)


회의로 일렁이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사로잡았던 것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 였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아카데미아 학파의 방식을 따라, 만사를 의심하고 만사에서 흔들리는 가운데 나는 마니교도들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5.14.25).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신플라톤주의와 마주하게 되고, 회의주의를 버리게 된다. 악이란 실체가 아니라 단지 선의 결핍일 뿐이라는 결론을 통해 마니교의 선악 이원론을 극복하고, 그리스도교로의 회심을 준비하게 된다.


 

(2) 실존적, 윤리적 차원

 

철학의 문제들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악의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평생 동안 괴롭혀 왔던 문제이다. 그에게 악이란 실체가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질문은 지성적 차원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가 끊임없이 빠지곤 했던 죄악의 유혹 앞에서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질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단순히 그에게 이 문제가 지성적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의 고백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폰티키아누스에의해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던 마니교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제가 얼마나 추한지, 얼마나 비뚤어지고 더러운지, 얼마나 때 묻고 종기투성이인지를 정면으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저를 보고 제가 소스라쳤는데 저 자신을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도망갈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한다.(8.7.16)


이 문제는 그리스도교로 회심하는 것이 옳다고 철학적으로 확신을 가진 이후에 더더욱 불거지기 시작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교설이 옳음을 너무나도 명증하게 알지만, 육체의 정욕 때문에 회심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혀는 어디 갔는가?”(8.8.18). 스스로의 미적거림에 대해 단 한마디도 변명할 것이 없다는 표현이다. 주님을 원하면서 그에게 끝끝내 회심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8.7.17).


그는 끝내 무화과 나무 밑에서 울음을 터트리면서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도대체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주님, 언제까지 끝끝내 진노하시렵니까? 저희의 옛 죄악을 기억하지 마십시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저의 추접을 끝장내지 않으십니까?”(8.12.28).


그렇게 괴로워하며 나날을 보내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웃집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별안간 듣게 된다. “집어라! 읽어라!”(8..12.29).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도의 성서 사본을 집어들고 시선이 가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그 때 마주한 구절이 바로 로마서 13,13-14절, ‘술상과 만취에도 말고, 잠자리와 음탕에도 말고, 다툼과 시비에도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정욕으로 육신을 돌보지 마시오.’였다. 그는 그 구절을 읽자 마자 “순간적으로 마치 평정의 빛이 내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다”(8.12.29)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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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온, 카잔차기스 묘.
그의 묘소에 적힌 글귀는 이렇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방문했을 때 꽃과 함께,
그리스 여행기간 내내 열심히 읽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글 번역본을 두고 왔다.

 


 

3. 결국 다시 왜? - 윤리적 이성


 


3.1 윤리적 이성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 해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자신의 죄에 대한 토로의 목적을 가진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두 가지의 차원으로 나누어 고백한다. 철학적 차원에서 그가 겪었던 지성적 투쟁을 고백한다. 실존적, 윤리적 차원에서 스스로를 회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육욕과의 투쟁에 대해 고백한다. 이를 통해 그는 신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찬미하게 만들려고 한다.


비그리스도교인으로서, 나는 그가 고민 끝에 맞닿은 답에도, 그의 고백이 성취하려 했던 목적에도 공감하지 못한다.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 믿는다. 아마 대부분의 비신자들은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결국 『고백록』이라는 저작은 신자에게만,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에게만, 유의미 할 수 있는 저작인가?


그가 내린 그리스도교적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가 답에 닿기 위해 거쳤던 삶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취했던 삶의 태도에서 무언가 배울 수 있다. 철학적 차원의 문제들 앞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진리에 닿기 전까지 타협하지 않는 집요함과 엄밀함, 치열함과 진리에 닿은 후 그와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해 엄격하게 스스로 꾸짖으며 환멸하려 하는 삶의 태도들에서 말이다.


19살 때 『호르텐시우스』를 접하고 난 뒤 평생 그는 진리를 향한 열망을 마음 속에 품고 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정말로 옳은 것, 불멸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어떤 타협도, 적당함도 용납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마니교의 교설을 거쳐,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도달한 그리스도교의 진리로 그는 성찰과 자기반성, 그리고 논박을 통하여 정말로 옳아 보이는 것에 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지성적 추구의 끝에 도달한 답에서도 그는 행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천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그를 끊임없이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육욕의 중력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삶과 실제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그는 눈을 돌리고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은 용기로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고,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신 앞에 세웠다. 스스로에게 가차 없이 비판을 가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며, 기도하고 기도했다. 제발 자신을 구해달라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이성적 탐구가 윤리적인 행위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일종의 윤리적 이성의 현현을 목격한다. 누군가 어떤 일이 옳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에게 남겨져 있는 선택지는 그를 실천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여러 현실적 조건들과 상황들 앞에서 갈등한다. 이를 실천했을 때 내가 감수해야 할 고통들, 내가 포기해야 할 여러 달콤한 이득과 편의들을 언제나 상상하기 마련이다. 이런 고통들은 양심에 따르는 옳은 행동을 했을 때 얻는 기쁨보다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더욱 생생하고 자극적이다. 그렇기에 옳음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눈을 돌려버린다. 나지막하게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린 다음,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고는 한다.


언제나 진리를 따르라고 교조적으로 연설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옳은 삶을 따르는 것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 실존이 가지고 있는 유약함과 나약함이 계속해서 족쇄처럼 그들을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래서 고백한다. 자신이 얼마나 유약했는지. “죄스러운 애욕의 냄비”가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 곁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기꺼이 이런 인간 실존의 나약함에 대해 긍정한다. 그리고 인간적 욕구의 충족들이 가져다주는 행복이 진리로 나아감을 막음이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최소한 그 간극 사이에서 눈을 돌리고 자기를 기만하지만은 말라고 주문한다.


그렇기에 만약 자신이 정말로 옳다고 믿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인간 보편의 실존적 조건이라면, 그의 고백록은 여전히 읽을 만하다.(그리고 나는 이것이 아마 모든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고민이라고 믿는다.) 시대와 지역 종교를 뛰어넘어, 『고백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3.2 남아 있는 문제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주문을 절반만 받아들였을 때,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아포리아에 빠지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적 욕구의 중력에 사로잡혀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 실존의 나약함에 대해 인식하라고 우리에게 주문한다. 그 이후 이런 욕구들의 경향성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함을 말하고, 진리에 닿기 위해서는 오로지 신의 은총이 우리 욕구의 방향성을 진정 사랑할만한 것들을 향해 돌려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해결책이 지금, 여기의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가?


그리스도교적인 신을 인정 할 수 없는 비신자들에게 이 해결책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직시의 요구 즉, 우리가 가지는 욕구의 경향성이 진정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고, 그것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 하라는 요구 또한 거절하기 어려운 것 이다. 그러나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안을 절반만 받아들일 경우, 우리가 다다르게 될 결론 또한 명확하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욕구의 경향성 앞에서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진정으로 옳은 것으로 향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나약함 앞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


이 귀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 귀결 아래서, 인간은 오직 괴로워하거나 고통받는 삶이나 맹목적으로 욕구를 쫓는 동물적 삶중 하나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과연 정말로 신을 믿지 않는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 선택지만 놓여있는가? 이 귀결을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전제 중 하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가 진정으로 옳은 것을 쫓는 목표와 상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는 방향성에 인간의 욕구가 방해가 되지만, 욕구의 방향성은 인간 스스로 통제 불가능 하다. 신의 은총이 없다면, 인간이 마주하게 될 운명이란 뻔하다. 지금, 여기의 비그리스도교인이 이 아포리아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 온전하게 이 아포리아의 탈출을 다루기는 어렵겠지만, 그 가능성을 살펴볼 수 는 있을 것 같다. 인간 욕구의 경향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 아포리아를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향성이 정말로 통제 불가능한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언급처럼,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나 공포, 육적 욕구들처럼 통제 불가능한 경향성들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중력과도 같은 경향성들 앞에서 진정으로 옳은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사람들의 예시를 보고는 한다. 죽음 앞에서도 결연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주장하고, 그 결과로 따라오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안다. 이 경우들이 인간 욕구의 경향성을 신 없이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시하지 않는가?


이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을 통해 예시되었던 가능성이다. 트로이의 전장을 누비던 아킬레스는 안락하고 편안한 인간의 삶과 전장에서의 죽음으로 얻어질 명예를 통한 영원한 삶 가운데서 무엇을 선택하였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도 기꺼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오이디푸스는 말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왕의 자리를 앞에 두고, 스스로 파멸시킬 끔찍한 진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결과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앞을 볼 수 없는 두 눈과 추방당한 자로서의 삶뿐이었지만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벌어진 그의 재판에서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테네 시민들의 등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이들은 분명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행복론 하에서는 당신이 누구임일 알려주는 것은 습관을 통해 형성된 당신의 성격이다. 이 성격은 의식적인 노력, 즉 지속적인 습관화 작업을 통하여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욕구는 우리에게 중력과도 같이 작용하지만, 우리가 어떤 습관을 통해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중력에 거슬러 삶을 살아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신을 인정하지 않는 지금, 여기의 비그리스도교인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로 이 글에서 제시한 대안이란 것이 고대 그리스적인 정신으로 회귀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택지는 영웅의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귀한 영혼들에게나 허락된 선택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여전히 200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과 별 다르지 않다. 영웅이 될 것인지, 신의 품에 안길 것인지의 선택지이다. 결국 지금, 여기의 우리 역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할 것인가? 신의 품에 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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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에나.
이탈리아 방문했을 때 몇년 만의 폭설이 내렸다.
버스 이동은 그래서 너무 고됐었지만,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았으니 잘 된건가. 모르겠다.




4. 나가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여전히 읽힐 만하고, 읽혀야 될 작품이라고 내가 설득력 있게 주장한지 모르겠다. 사실 처음 『고백록』을 집어 들었을 때는 별 깊은 생각 없이,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에서 다루는 원전 하나 정도는 읽어 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최소한 두 줄에 한 번씩은 언급되는 ‘주님‘에 읽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런데 조금만 참고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다 보니, 술술 읽혀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마주했던 여러 삶의 굴곡들과 그에 대한 솔직한 소회들을 읽다보면, 마치 그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고백록』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나도 그랬었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년기 가련하게 아파하기 좋아하여 눈물과 고통을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했고,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금방은 말고.”라는 구절을 읽으며 격하게 동의했기도 했다. 우울해지거나, 머리가 아파올 때마다 가방에 넣어둔 책을 꺼내 읽고는 했다. 삶 속에서 아파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을 보며, 같이 아파했고 눈물을 흘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보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내 이름을 책 앞표지 뒤에다 적어놓은 『고백록』은 두 페이지에 한 번꼴로 페이지가 접혀져 있고, 매 페이지마다 볼펜으로 줄 그어 놓은 곳이 빼곡하다. 위의 논의를 다 떠나서 『고백록』 일독을 권한다.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p.s 본문의 모든 인용은 『고백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직접 구절들을 찾아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짧은 노트를 남긴다. 제일 앞에 있는 숫자가 구절이 속해 있는 권이고, 뒤에 붙어 있는 두 숫자들은 그 권 내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직접 분류해 놓은 절들의 숫자이다. 예를 들어서, 3권의 2번째 장의 4번째 단락이면, (3.2.4.)와 같은 넘버링을 가질 것이다.



[김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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