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평범하지 않아 매력적인, 로라와 키브린을 위해 [도서]

글 입력 2019.07.13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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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고 미루던 책을 바빠서 읽게 되는 시기가 있다. 뭔가 해야 할 일은 넘쳐나는데 하고 싶은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시기. 이런 때는 괜히 평소에는 진도가 안 나가던 책들도 술술 읽힌다.


내게는 요 며칠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전에 읽히지 않던 소설에 괜히 손이 갔다. 게다가 여름이 되어 지긋지긋한 불면의 밤이 도래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덕분에 며칠 동안 네 권을 책을 독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눈먼 암살자> 두 권과, <둠즈데이북> 두 권이다.

두 책에는 장르적인 공통점이 존재한다. <눈먼 암살자>의 저자인 마거릿 애트우드와 <둠즈데이북>의 코니 윌리스는 둘 다 SF 작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유명하다. 여성 주인공이 사건의 중심에 놓여 서술한다는 점도 물론 유사하고, 시점이 계속해서 교차되는 구조도 비슷하다. 이런 점을 제외하고는 두 책에 내용적으로 닮은 점이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두 책을 연속해서 읽다 보니 인물들의 엇비슷한 면이 자꾸 겹쳐 보여서 신기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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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


내가 비교하고 싶은 두 인물은 <눈먼 암살자>의 로라와 <둠즈데이북>의 키브린이다. 로라는 작중에서 책 <눈먼 암살자>를 서술한 작가로 설정되고, 이야기 자체는 그의 언니 아이리스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즉 아이리스의 과거 회상과 로라의 책 <눈먼 암살자>가 교차되는 구조라고 보면 된다.

상당한 반전이 있는 소설이라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로라를 온전히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소설을 중반 정도만 읽고서도 로라가 얼마나 강단 있고 ‘평범하지 않은’ 여성인지 감이 올 것이다. 그러니까 로라와 아이리스가 1900년대 초~중반에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을 감안하면 아이리스가 보다 전형적인 당시의 여성상에 가깝고 로라는 삐딱선을 타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책을 완독한 사람은 알 것이다. 아이리스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로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사례가 책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지만, 유독 인상적인 몇 장면이 있다. 삶을 포기하기 위해 급류에 뛰어들고, 자기를 살리기 위해 붙잡은 아이리스를 물 속에서 부릅뜨고 노려보던 장면. 상류층 출신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놀이동산 와플 가게에서든 정신병동에서든 태연하게 일하는 로라를 묘사한 장면. 그리고 결혼한 아이리스를 대하는 로라의 태도를 묘사한 장면들이다. 대놓고 비난하거나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의 불만을 표시하는 태도. 작가는 인물들의 이런 미묘한 성격차를 훌륭하게 묘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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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북>, 저자 코니 윌리스


로라의 패기가 시대적인 한계에 부딪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마무리되었다면, <둠즈데이북>의 키브린은 야망을 실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눈먼 암살자>보다 훨씬 잘 읽히는 이 소설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2050년대에 중세시대로 떠난 대학생 키브린과, 그의 지도교수인 던워디의 시점이 교차 진행된다.

중세시대로 가겠다는 열망 하나로 라틴어, 의학 기술 등을 비롯해 온갖 중세 풍습을 척척 익히는 키브린은 보통 학생이 아니다. 비록 시간여행 시작부터 병에 시달리고 낯선 곳에 떨어져 수모를 겪지만, 훌륭한 적응력과 상황 대처 능력으로 살아나가는 모습은 감탄스럽다. 마을 사람들 사이의 얽힌 관계들을 신속하게 파악해내는 눈치도 백단이다. <중세에서 살아남기>같은 책을 써도 될 만한 능력치가 아닌가.

특히나, 마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내는 모습에서 얼핏 로라가 보이기도 했다. 결연해 보이는 굳은 표정과 약간 찡그린 눈, 꼭 다문 입술까지. 비록 상황이 거지같아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듯한 의지가 둘은 참 닮았다.

*

가만 보면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확실히 뚜렷한 특징이 있다. 다소 극단적으로 보일지라도 답답하지 않은 인물들.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무기력한 인물보다, 내면에 부글거리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편이 매력적이다. 어쩌면 답답한 상황을 참지 못하는 내 성격 탓에 그런 캐릭터에 더 쉽게 이입하는지도 모르겠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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