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은 산 사람들의 몫이다. [영화]

글 입력 2019.07.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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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통을 애도라고 호명한다. 슬픔과 비탄과 분노와 절규 같은 것들이 병존한다. 세월호는 집단적 애도의 물결을 만들었다. 모두가 애도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구조 때문에 발생한 재난이었다. 구조를 만드는 데 가담한 우리는 책임감을 느꼈다. 세상 따위에 발 딛고 서 있는 게 부끄러웠다.


애도에 유효기한이 있다고 보는 이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경제지표를 가리켰다. 비탄하고 분노해서 수치가 밑바닥에 고여 있다. 그것이 슬픈 일이라는데 동의하지만 애도의 지속은 살아있는 ‘우리’의 생존에 도움되지 못한다. 이만하면 됐다는 것이었다. 그 해 6월에 지방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우리의 생존을 구호로 외치던 집권여당이 우세한 양상으로 끝났다. 7월에 있던 보궐선거는 여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애도가 중단돼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모두가 동조했다.


<죄 많은 소녀>는 애도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다. 애도가 이뤄지는 방식을 조명한다. 거기 장착된 뒤틀린 감정을 보여준다. 당신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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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자살한다. 교사는 자기 경력을 읊으며 자살을 4번 봤다고 말한다. 시끄럽고 울고 경민이 왜 그랬을까를 모색하려는 시도는 길어야 6개월 정도다. 죽음은 일시적이다. 연속되지 않는다. 너희의 인생은 앞으로도 연속된다. 그러니 문제 하나 더 공략함이 더 나은 인생을 영위하는데 보탬된다.


적어도 경민과 같은 반이었던 동급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희를 찾아간다. 경찰은 자살 직전의 경민이 영희와 동행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영희가 가해자라는 구체적 증거는 없고 어쨌거나 경민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 죽은 것이었다. 경찰은 수사를 종결한다. 동급생들은 경민의 자살과 영희의 동행 사이 행간을 파고든다. 영희가 경민의 자살에 기여한 게 있을 거라 추정한다. 그들은 영희를 괴롭힌다. 때리고 갈취하고 스스로 말하도록 종용한다.


경민은 겉도는 아이였다. 특이하고 주류에 편입될 생각 없었다. 경찰 수사에서 동급생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경민과 학우들 사이엔 별반 친밀감 같은 게 누적되지 않았다. 동급생들이 영희에게 죄를 묻는 건 그게 애도의 한 방식이라고 믿어서다. 석연치 않은 죽음이고 그 석연치 않음을 파헤쳐 분명한 인과를 파악하는 게 경민에게도, 남겨진 이들에게도 온당한 절차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웃고 있다.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을 통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취해 있다. 온당한 절차를 집행하는 ‘나’, 혹은 가해자에게 복수를 집행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나’라는 것에 도취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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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민의 엄마가 있다. 경민의 엄마는 목 놓아 울지 못한다. 경민의 죽음에 자신이 일조한 게 있을까 봐 두려워서다. 그 역시 영희를 가리킨다. 영희 주변을 맴돈다. 너 역시 경민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느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군다. 영희의 병원비를 경민의 보험비로 마련한 것이라 말하는 식이다.


경민의 엄마는 영희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싶어 한다. 책임감, 부채감, 두려움 같은 것들을 명백한 악인에게 배설하고 싶다. 그럼으로써 악인과 자신을 경계 지으려 한다. 대상을 지목하여 오직 그에게 죄의 책임을 묻는 건 어쩌면 가장 편한 방식이다. 경민의 엄마는 그럼으로써 경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을 덜어내려는 속셈이다.


그래서 영희는 복수를 맹세한다. 그가 느꼈을 법한 상실과 고통의 감각 그리고 죄책감은 아무도 따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그는 위로받아야 할 대상이다. 미성년이고 그가 경민을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가 오히려 명백하다. 모두가 자신을 가해자라고 지명한다. 그를 위로하는 이 아무도 없다. 자기에게 죄가 없음을 스스로 증언해야 하는 형편에서 영희 역시 뒤틀려 간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우리는 세월호를 겪었지만 그 이후 치러야 할 애도의 과정은 배격했다. 특정한 가해자를 지정하여 그에게 모든 책임을 덮었다. 죽은 이들과 남겨진 이들의 슬픔을 용납하지 않았다. 적절한 보상의 방편이 마련됐으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담론이 주를 이뤘다. <죄 많은 소녀> 속 인물들이 치르는 애도는 그 당시의 풍경과 유사하다. 뒤틀려 있고 그 뒤틀림에서 괴물 같은 군상이 발생한다. 죽음은 산 사람들의 몫이다. 산 자들은 단지 죽음 이후의 고통에서 이탈하고 싶어 배설할 대상을 찾는데 혈안이었다. 그건 비틀려 있다. <죄 많은 소녀>는 그걸 보여준다. 애도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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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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