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쉼을 만들어가는 전시 '박서보 회고전'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7.1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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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를 통해 선물받은 관람객들의 회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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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서늘한 여름은 모든 생명체가 활동적이면서도 충분한 휴식을 누리기에 알맞은 계절이다. 적당히 뜨거운 한낮과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은 온도차와 함께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의 중턱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해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기획한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는 박서보 작가의 회고전이라는 주제와 걸맞게 계절성에서도 타이밍이 맞았다.

작가라는 타이틀 이전에 한 사람의 인생과 고뇌가 오롯이 담긴 미술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은 일종의 '자기 회고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회고전'을 주제로 한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장에 들어서면 박서보 작가의 약력과 그를 미술사적으로 정의 내린 글이 적혀 있다.

"(중략) 박서보는 1956년 반국전 선언의 주역으로, 1957년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 작가로 한국현대미술사에 각인되었다. (중략)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한국미술에 내재된 고유한 정신과 조형언어를 재료의 물성과 행위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박서보 작업의 독창성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박서보의 위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그 미술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과 '앵포르멜 작가'로 수식된 작가 박서보의 소개는 회고전의 무게감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그 무게감은 권위적이지 않고, 긴 인생에서 담아낼 수 있는 시간의 무게였다. 그의 약력과 미술학계의 정의로 시작된 전시의 도입은 작가에게는 존경을 보내는 장치였다. 그리고 관람객에게는 작품을 진지하게 마주하도록 안내자 역할을 했다.

박서보 작가에 관해 문자적으로 알았다면 이어지는 전시는 총 5개의 파트로 구분되어 그의 실제 미술 작품을 마주한다. '원형질 시기'와 '유전질 시기'는 그의 초기 작품의 경향을 담고 있다. 이후에는 박서보 작가만의 독창성인 '묘법'이 등장하는 시기로 '초기 묘법 시기'와 '중기 묘법 시기', 최근 작품의 경향이 담긴 '후기 묘법 시기'까지 이른다. 초기 작품 창작의 시기인 '원형질 시기', '유전질 시기'는 그가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이 반영된 작품과 '박서보'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고뇌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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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질 시기, 원형질(原形質) Primordialis No.1-62, 1962, 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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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질 시기, (좌)비키니 스타일의 여인, 1958, 캔버스에 유채, (우)유전질(遺傳質) Hereditarius No.7-69-70, 1970, 캔버스에 유채


원형질 시기의 작품은 그가 한국전쟁의 참상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에 주로 이루었다. 경험한 고통을 두텁고 어두우며,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색채를 사용해 표현했다. 특히 캔버스를 힘으로 눌러 굴곡을 만드는 작업은 그가 간직한 당대의 경험의 상흔을 짐작게 한다.

시간이 지나 박서보는 자신만의 창작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로 넘어갔다. 주로 기하학적 드로잉과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작업하여 원형질 시기와는 다른 화법을 보였다. 초기 시기인 두 시기 사이에 일어난 화풍의 변화는 끊임없는 개선을 추구하는 작가의 열의인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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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묘법 시기, 묘법(描法) No.6-67, 1967,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한국사의 큰 굴곡을 넘어 자신을 찾고자 한 그의 행보는 앞선 시기의 열정적인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작가 자신도 자기다움이 무엇인지 그 답을 바로 찾지는 못했다. 위 작품은 그의 초기 묘법 시기를 연 작품이다.

자신의 아들이 글 연습을 위해 칸이 그려져 있는 공책 위에 글을 쓰려다 잘 안 써져 그 위에 애꿎은 낙서를 하고만 것을 보면서 박서보는 자기다움이란 그것을 찾고자 하는 욕심을 포기한 체념의 행동이 자신만의 정체성임을 정의 내렸다. 이전 시기의 작품에 비해 무채색과 형태의 단순함은 그 깨달음이 박서보에게 답이 되어주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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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묘법 시기, 묘법(描法) No.930215, 1993,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정체성을 찾고자 한 수많은 시도와 실패, 좌절의 시간들이 캔버스를 격자무늬의 속이 비어있는 듯한 단순한 형태를 만들어냈다. 정체성을 찾는데 목적을 두는 게 아니라 그것을 미완의 문제로 남겨두고 자신의 그간의 행보를 받아들임을 자기다움으로 정의했다. 초기 묘법 시기의 빈 격자무늬에 시간이 다시 흘러 여러 무늬가 새겨졌다.

자기다움이라는 순수한 목적이 욕심이 되어버려 자신을 잃는 역설이 되지 않도록 작가 박서보의 고뇌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자신을 비운 것으로 여겨지는 초기 묘법의 작품에 다시 박서보는 붓을 들었다. 격자무늬 한 칸마다 여러 작업 방식이 요구되는 과정을 거쳐 자연의 형상을 그려 넣고 자 했다. 작품이 주변과 동화되는 것처럼 작가에게 정체성이란 찾고자 하는 목표의 달성이 아닌 자연스러운 호흡과 존재의 상태로 있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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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묘법 시기, 묘법(描法) No.161207, 2016,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최근 작가의 작품 경향이 나타나는 후기 묘법 시기에 이르러서는 작품의 구성은 더욱 단순화된 형태다. 색채감에서 자연에 지속적으로 영감을 받아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을 준다. 초기 작품의 경향에서 나타나는 화려한 색채가 다시 등장했으나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분위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에서 찾아낸 박서보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더욱 추상화되었다. 이는 자신을 명확한 단어로 정의 내리지 않으려는 작가의 확고한 의지다. 자연과 같이 그 무엇도 담아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고 싶어 하는 작가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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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묘법 시기, 묘법(描法) No.090206, 080618, 071021, 2009, 2008, 2007, 캔버스에 한지 혼합매체


작가 박서보는 자신의 개인적인 내면의 상태인 좌절과 고뇌를 작품에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그의 인간적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한 공간에 모여져 있는 '박서보 회고전'은 관람객들에게도 자신의 내면을 보도록 자연스럽게 이끈다. 전시의 실제 구성은 위의 순서와 달리 역순으로 진행된다. 박서보의 최근 작품 경향으로 시작되는 전시의 순서에서 관람객들은 자신의 현재를 되돌아볼 수 있다.

긴 시간 다듬어지고 빚어진 형태의 최근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기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초기작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이동에서 작품의 변화는 그의 고뇌가 무엇이었는지 추적한다. 작품의 변화가 구분된 파트별로 뚜렷하게 이루었기에 작가 박서보의 생각의 변화에 관람객의 공감도 손쉽게 이루어진다. 과거의 작품들에서 관람객들이 그의 고뇌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여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작가 박서보가 아닌 인간 박서보의 개인적 고민이 작품에 진솔하게 드러났기에 작품과 관람객들 사이의 대화가 가능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기의 정체성을 미술작품을 통해 찾고자 한 작가 박서보의 일생은 회고전이라는 한 공간에 작품들이 모임으로써 빛을 발했다. 그의 일생은 단순한 찬사에서 벗어나 관람객들과 호흡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관람객들은 작가 박서보의 현재와 과거를 역순으로 따라가면서 앞선 다듬어진 작품이 있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뒷받침해주고 있음을 알아간다. 이 과정은 관람객들의 현재와 과거를 반추하게 기능하고, 모든 순간들이 아름답고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을 전달한다.

그의 인간적인 친밀감이 담긴 작품이 관람객들에게 먼저 따스히 말을 건네고 있다. 회고전이라는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심화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시작, 초심'이 무엇이었는지 역으로 회고의 질문을 받는다. 유난히 관람객들의 사색 어린 표정이 가득한 '박서보 회고전'이다. 이는 작가 박서보의 일생이 회고전이라는 타이틀로 조명 받는 것 이전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숨겨진 메시지를 해석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의 기록이 담긴 작품의 총망라에서 작가는 관람객들에게 잠시 여유를 갖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네고 있다. 그 돌아봄에서 뜻밖의 성장과 깨달음이 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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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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