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영화 오래 보기 - 고양이를 부탁해에 대해서 [영화]

글 입력 2019.07.17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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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오래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다. 처음 볼 때는 별 감흥이 없다가도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등장인물의 한 대사가, 표정이 껌처럼 머리에 착 달라붙어 의식할 때마다 보고 또 보게 되는 영화들. 나에게는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랬다. 처음 본 이후로 생각날 때마다 자주, 많이, 오래 봤다. 그리고 결국 ‘고양이를 부탁해’는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이 글은 인생의 한 지점들을 통과할 때마다 한 영화가 나에게 어떻게 다르게 다가왔는지, 결국 어떻게 인생 영화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중·고등학교 - 자유에 대한 희망



계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배두나라는 배우에 호감을 가질 때였다. 인터넷 검색창에 ‘배두나’를 치고 배두나가 나온 영화들을 하나하나씩 찾아봤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중 하나였다. 그러니 처음에는 당연히 배두나를 중심으로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속된 말로 말하자면 배두나의 ‘얼굴이 재미있’었다. 하얀 얼굴에 동글동글한 눈과 코가 좋았다. 그 동글동글한 눈코입들이 오밀조밀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표정을 닮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도, 그 목소리에 묻어 나오는 조금은 어눌하지만 똑똑하게 들리는 발음도 좋아했다.

 

하지만 단순히 배두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면, 다른 영화들을 더 찾아보며 다양한 배두나의 얼굴을 보는 게 더 좋았을 거다. 하지만 그 즈음의 나는 줄곧 ‘고양이를 부탁해’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에 나오는 배두나를, 그러니까 ‘태희’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그 인물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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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에는 20살을 맞은 다섯 명의 친구가 나온다. 태희, 혜주, 지영, 쌍둥이인 비류와 온조까지. 친구지만 성격도 환경도 매우 다르다. 그중 태희는 소위 말해 가장 ‘철없는’친구다. 자립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친구들과는 달리 부모님이 운영하고 있는 맥반석 체험관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다.


하지만 답답한 가족에게서 늘 벗어나고 싶어 한다. 꿈꾸는 일은 나룻배를 타고 온 세계를 여행하면서 사는 것. 맥반석 가게 전단지를 돌리다가 선원 사무실에 들어가 무작정 ‘저도 배를 탈 수 있을까요?’하고 물어보기도 하는 엉뚱한 면이 있다. 태희의 가족들과 태희의 친구 해주는 이런 태희를 한심하게만 보지만, 중·고등학교 때의 나는 태희의 꿈에 깊이 공감했다.


그때 내 일상을 지배하던 감각은 답답함이었다. 하루에 무조건 일정 시간 이상을 버티고 앉아 있어야 하는 교실이, 책상과 의자가 불편했다. 학교에서는 해야 할 것들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많았다. 아주 좁은 길을, 나 혼자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가족들 사이에 있어도 편하지 않았다. 나만의 취향, 나만의 시간, 나만의 생각에 깊이 빠지기 시작할 때였다. 목적지나 시기가 분명하지 않았어도 항상 내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다.


현실적이지는 않은 유랑을 꿈꾸는 태희를 보며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태희가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지영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때의 나에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나도 언젠가는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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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 인간 관계에 대한 공감과 위안



험난한 입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와, 나름대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마냥 즐겁고 행복할 것 같았지만 얻는 게 있으니 잃게 되는 것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관계’였다. 특히 친구들과의 관계가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친구들과의 관계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에 가까웠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또래들과 학교라는 공간에 같이 갇혀 있어야 하니 서로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는 달랐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내가 따로 시간을 내서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친해질 수 없었다. 가깝던 친구들과도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졌다. 한편으로는 대학교에 들어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과 만나고 친해지게 되면서 이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관계에서 오는 부담감도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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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섯 명의 친구들이 관계에서의 혼란을 겪는 장면들이 나온다. 특히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해주와 지영은 성인이 되고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걸 깨닫고 멀어지게 된다. 해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기업의 사무직으로 취업한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밀리기 일쑤다.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쇼핑뿐이다.


반면 지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으로 취직한다. 그마저도 문을 닫게 된 지영은 앞으로의 삶이 막막하다. 가정 형편 때문에 더 나은 일자리나 꿈을 찾을 여유가 없다. 해주는 미용실에 가지 않고 집에서 탈색을 하거나, 구식 핸드폰을 쓰는 지영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영은 친구들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고, 만나서도 자신을 위한 쇼핑만을 하는 해주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둘은 영화 끝까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직도 친구지만, 끝까지 서먹한 관계로 남는다. 대신 영화는 지영과 태희가 가까워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 드디어 가족에게서 자립한 태희가 갈 곳 없이 막막한 지영에게 손을 내민다. 이 세 명의 관계가 좋았다. 어떤 관계는 멀어지지만, 어떤 관계는 또 자연히 가까워진다.


"멀어진 사람과 억지로 가까워질 필요도, 누군가와 억지로 친해지려 할 필요도 없다."고 영화가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멀어지는 친구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섭섭했던 마음도, 대학교에 들어와 새롭게 친해지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마음도 달래주는 것 같았다.




지금 - 이제야 알게 된 사회의 민낯, 고양이를 부탁해가 말하고자 했던 것



고백하자면, 나는 한참 동안 이 영화의 분위기, 노래, 인물들, 잠깐의 장면들 등 영화의 단편적인 구성들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 뿐,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의미망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를 오래 봐 오면서 언젠가부터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고양이를 부탁해’ 이전에 다른 영화에서 나오던, 갓 성인이 된 여성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잘 꾸며진 바비인형 같을 때가 많았다. 어리고, 예쁘고, 소위 말해 ‘싱싱한’ 인물들로만 표현될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그들의 생각이나 의견이나 꿈보다 그들이 타인에게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나온 태희, 혜주, 지영, 비류와 온조는 조금 달랐다.


길을 지나가다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생생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고 있었고, 그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니까 영화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들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막 사회에 나선-여성들의 모습을 충실히 그려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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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들이 성인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사회의 민낯이 덤덤하게 그려지고 있다. 태희는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계속해서 할 말과 설자리를 잃어가고, 지영은 새로운 직장을 얻기 위해 면접을 보는 와중 ‘술은 좀 마시나?’라는, 다분히 성적인 조소가 가득한 질문을 듣고, 해주는 회사 생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노력에 대한 평가보다는 외모에 대한 평가를 먼저 받는다. 미래 역시 막막하다.


지영과 태희가 정신병을 앓으며 거리를 배회하는 여자 노숙자에게 위협을 받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지영은 이후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무서워’라고 이야기한다. 그 모습에서 지영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지영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공감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태희 역시 다른 결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아버지와 오빠의 뒤에 서서 가족을 부양하기만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태희가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주체는 사라지고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의 돌봄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얼핏 읽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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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까지도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여성들이 공유하게 되는 현실과 공포가 아닐까. 사회에서 능력으로 인정받기보다 외모로 인정받기가 더 쉽고, 능력을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에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앞으로 평생 아내나 어머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언젠가 길거리를 떠돌며 쓰레기나 폐지를 모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생존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는다.

 



한 영화 오래보기 - 영화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감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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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 내게 이 영화는, 나는 물론이고 나와 비슷한 또래들, 특히 이제 막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이를 태면 자화상 같은 영화가 되었다. 이렇게 ‘고양이를 부탁해’는 내 인생영화가 되었다. 하루에도 몇 편씩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이렇게 한 영화를 오래 반복해서 보는 걸 이해하지 못 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나는 태희, 혜주, 지영, 비류와 온조를 만났고, 그 인물들 덕분에 때로는 희망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인물들을, 한 영화를, 삶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가끔은 이렇게 한 영화를 ‘오래’ 봐 보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영화감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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