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떠돌기로 했습니다. [영화]

글 입력 2019.07.1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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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집이 갑자기 없어진 것 같은 경험을 하면 어디로 떠나고 싶다. 3년 전, 그런 이유로 런던에 갔다. 다른 여행과는 달리 숙소를 기준으로 가고 싶은 거리의 이름을 적었다. 목적지로 가고 있지만 방황하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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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의 작품 <프란시스 하>를 보면서 3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세계적인 무용수를 꿈꿨던 브루클린에서부터 크리스마스 무대에 선다는 희망에 차 있던 차이나타운의 아파트, 크리스마스 무대 대신 가게 된 고향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를 거쳐 갑작스레 결정한 파리, 무용과 전혀 관련 없는 기숙사 조교와 웨이트리스 일을 했던 뉴욕의 포킵시, 방황을 마치고 안무가로 새출발하는 워싱턴 하이츠까지.

거리에서 거리로 이동하는 프란시스를 따라 유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낭만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흑백 필름을 통해 보여준다. 프란시스의 세상은 색채가 있지만, 관객이 보는 건 무채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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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하는 청춘



분명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끝까지 참고 버틴다. 그 일이 자신과 안 맞을 수도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쟨 포기했지만 난 끝까지 버틸 거야, 라는 생각도 한다. 떠난 사람은 실패한 걸까?

 

아니다. 3년 전 나는 첫 회사가 갑자기 없어진다는 통보를 받았다. 갑자기 집에서 쫓겨난 기분이었다. 런던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다시 비슷한 직무에 지원했다. 열정도 좀 남아있는 것 같고, 애매하지만 경력도 있고, 여기서 버티면 어딘가엔 내 이름이 올라갈 테니까. 안 맞는 걸 알면서도 붙잡고 있었다.


커리어는 집과 같다. 월세를 전전하기보다 정착하고 싶다. 내 집 마련을 꿈꾸는 이유 중 하나는 어딘가에 정착해 자신의 역사를 쌓고 싶기 때문이다. 집 구할 때 월세인지 전세인지, 남향인지 북향인지, 역세권인지, 편의 시설은 가까운지 꼼꼼하게 따진다. 두 번의 퇴사를 하고 나서야 이런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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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러웨이'에서 '하'로



극의 초반, 프란시스는 워싱턴 하이츠도 살기는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흘려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워싱턴 하이츠에 정착한다. 우편함에 프란시스 '할러웨이'가 맞지 않자 종이를 접어 프란시스 '하'로 남겨두면서 영화는 끝난다.


프란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접어넣는 장면은 그녀가 정신적으로 단단해졌음을 뜻한다. 세계적 무용수 '프란시스 할러웨이'에서 안무가 '프란시스 하'로 변하기까지 좌절감이나 모멸감을 수도 없이 겪었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하지만, 프란시스가 공원에서 춘 춤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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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에겐 집이 없다. 여기에도 살아보고 저기에도 살아봐야 한다. 북향에도 살아보고 정남향에도 살아봐야 창문의 방향이 중요한지 알게 된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성공과 실패라는 흑백논리로 나눌 수 없다.


타이틀을 붙잡고 있다고 해서 이기는 것도, 그만한다고 해서 지는 것도 아니다. 실패하면 원하는 것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지난 시간이 쓸모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는 떠돌기로 했다. 이런저런 경험을 한 뒤에 프란시스처럼 단단해지길, 어딘가에 정착할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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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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