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벼운 전지적 인간 시점 - 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글 입력 2019.07.1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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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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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인이었다가 세일즈맨이었다가 로봇이 된 남자>. 제목이 길다. 제목이 길어서 멋대로 원.세.로 라고 줄여서 기재했다. 흥미로운 제목을 단편적으로 바꿔보자면 <인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정도로 바꿀 수 있겠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매우 넓고도 깊은데 어떻게 다루려고 하는 걸까. 목차를 보니 답이 나왔다. 과거, 현재, 미래별로 여러 가지 직업이 작은 제목으로 채워져 있었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고, 가볍게 훑는 느낌이겠구나. <역사 속 인간의 직업> 혹은 <직업으로 보는 인간의 전망> 혹은 <인간의 이해 개론> 같은 수업이겠다. 목차를 보고 나니 머릿속에 떠오른 곡이 <천태만상>이라는 곡이었다. 그도 그럴게 직업이 나열된다는 공통점이 있지 않나. 자, 구성진 노래도 한 번 들었겠다 책을 읽어볼 시간이다. 300쪽이 넘는 책이지만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법도 가지가지 귀천이 따로있나
재판한다 판사 변호한다 변호사 범인잡는 형사 계룡산에 부채도사
연구한다 박사 운전한다 기사 트럭 택시 기차 전차 버스 봉고 도저 기중기
요리한다 요리사 소개한다 중계사
파마한다 미용사 간호한다 간호사 얼럴러리여
천태만상 인간세상 사는법도 가지가지 귀천이 따로있나

- <천태만상> 윤수현


작가는 한 가지 직업을 선택해 그 직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글의 말미에서는 다른 직업으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풀려나간다. 억지스럽게 느껴지진 않았고 따라가기 좋은 의식의 흐름 기법 같았다. '직업 이야기+ 보다 상세한 역사 이야기'가 한 세트로 반복되고 있다. 읽을 때는 술술 읽히지만 직업을 어떻게 엮을지 작가의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서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여태까지 충분히 조명 받지 못했던 직업이 인상 깊었다.

세계사나 역사를 배웠던 사람이라면 오랜만의 복습 같았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랬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 '메소포타미아 문명'. '탈레스'. 역사를 좋아하진 않더라도 배워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늘 과거부터 배우기 때문에 그나마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 구석기, 신석기 시대, 단군왕검의 이야기는 근현대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문제는? 그다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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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과거에서 기억에 남았던 직업은 망나니. 이동변소꾼, 촛불관리인, 시체도굴꾼, 노커업(Knocker-up), 엿장수, 무당이었다. 그 중 정말 처음 들었던 이야기는 이동변소꾼, 촛불관리인과 노커업이다. 망나니야 사극을 봐도 휘청휘청하며 목을 댕강 자르는 직업이니 스트레스가 심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시대까지도 망나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서양에서도 고민이 많아서 사람 대신 단두대 같은 기계를 썼으려나 싶다.

시체도굴꾼은 나름대로 이해가 가는게 인체가 궁금하기는 한데 산 사람을 죽일 수는 없고 시체는 기증하는 대신 무덤에 고이 들어있으니 연구욕에 불타는 사람들이 가족이나 잘 아는 시체를 찾을 수밖에 없었을 터. 당시엔 돌았다고 했겠지만 덕분에 해부학이 발달했다고 하자. 엿장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나도 만났으면 집 안 냄비를 해먹고 엄마한테 엉덩이를 사정없이 맞았으려나. "메미일무욱, 참싸아알떠억" 하면서 목청을 높이던 얼굴 모를 장수 분과 비슷한 맥락이다. 왠지 따스한 느낌.

무당은 책에서 다뤄준 게 신기하긴 했다. 어쩌다 보니 동네에 무당집이 몇 군데 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무당이셨고, 어떤 젊은 청년이 어느 날 무당집을 열였다. 그들이 이상해 보이는 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 나를 그릇 삼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고, 지금 세상은 원하는 직업을 찾아 개척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여기는 결국 따라오는 운영이다.

이상하게도 숙명처럼 가족이 아프거나 죽고, 내가 도저히 힘들어 버틸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니까.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인지 우리야 당사자가 아니니 알 수가 없고, '사짜' 같은 사람이 많아 무당을 믿기 어렵다는 사람도 많다. 직업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그들도 이해할 수 없는 직업에 맞춰 사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점만 이야기하고 싶다. 뭐, 적어도 내게는 아직 이웃집 아주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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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이동변소꾼, 촛불관리인과 노커업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게 정말 기술이 발달하면서 없어진 직업이다. 화장실, 전등과 알람시계를 대체해주는 사람들이라니. 좀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당시엔 필수적이었을 텐데 어느 날 그들이 짠하고 지금 우리의 시대로 오면 기분이 어떨까.

거리가 너무 깨끗하고 다들 어느 방에 들어가 버려서 할 일 없는 이동변소꾼, 극장에 가면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어서 한껏 차려입어 놓고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촛불이 없냐며 담당자를 찾을 촛불관리인, 아침마다 누가 몇 시에 일어나라고 문을 쾅쾅쾅 두드리다가 큰 소리를 듣거나 신고를 먹고 이상한 사생활 침해자로 보일 노커업. 할 일이 없어져서 왠지 모르게 복잡한 심경일까? 비웃을 일만도 아닌 게 현재의 직업도 미래의 누군가가 보면 세상에, 2000년대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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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익숙한 편이라 짧다. 기억에 남은 직업은 사진작가, 기장, 우주비행사, 개발자. 여기서 공통점은 앞의 두 직업을 제외하고는 기술이 생겨서 함께 생긴 직업들이라는 점이다. 사진기에서 사진작가가, 비행기 덕분에 기장이, 우주선에서 우주비행사가, 컴퓨터 등 각종 기기에서 개발자가 나왔다.

전반적으로 기술에 초점을 둔 직업이 많아서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상담심리 혹은 심리치료사, 그리고 만화가, 유투버(인터넷방송 진행자), 배우, 연예인 등이 추가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기술만큼이나 사람의 생각이나 영향력이 큰 부분도 함께 강조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유투버는 정말, 요즘 초등학생 장래희망 5위안에 든다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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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전반적으로 직업 이름이 흥미로웠다. 가상현실제작자, 로봇수리사, 인공장기의사, 재계약결혼상담사, 욕망중개자, 기억세탁사, 꿈메이커, 배양육점주인, 날씨중개관리자, 행성중개인. 자연복원가나 노인, 노년 플래너를 제외하면 아주 독특한 이름이다. 재계약결혼상담사는 그럴듯했다. 요즘은 수명이 길어져서도 있고 결혼을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울지 결혼을 하지 않고도 걱정이 많다. 농담 삼아 결혼을 계약처럼 하고 재계약으로 연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했는데 같은 생각이 나와서 신기했다.

의아했다. 영화 <아일랜드>의 배경이 2019년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장기용'으로 따로 양성하고 있지 않다. 인간인지 모르고 태어났어도 인간이니 인권침해를 감안해서 인공장기를 만들어볼까. 인공장기는 인공의 벽을 정말 넘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나아가서 거의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면 행복할까. 장기만 바꾸고 겉모습은 그대로 노인인 것을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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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인간의 자신의 선택으로 욕망이나 기억. 꿈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을까? 농담 삼아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다가도 내 컴퓨터 하드가 걱정돼서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하지 않나. 기억을 세탁하는 일 역시 영화에서는 나왔지만 기억을 지워서 생기는 부작용이 염려되기도 한다.

꿈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지만 내가 밤마다 꾸는 꿈을 팔아야 한다니. 어쩌면 사업성은 있겠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팬들은 그 사람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을 궁금해할 테니까. 기억, 꿈,  욕망은 개인에게 민감한 부분인데다가 현재 우리의 정보가 탈탈 털리는 보안 환경을 생각하면 개인 정보가 유출될 위험도 무척 크게 느껴져서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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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조절관리자, 행성중개인도 마찬가지였다. 인공강우를 내리려고 수많은 돈과 인력을 쓰는 데 비해 효과는 미미한 편이다. 가능은 한 일일까. 지금도 지구 온난화 때문에 날씨가 이랬다저랬다, 비가 억수로 내리고 주먹만 한 우박이 내리며,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날씨조절관리자와 자연복원가는 무려 상극이다. 날씨를 조절하겠다고 하는 일련의 행동이 자연복원가의 눈에는 얼마나 치명타로 느껴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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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중개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닌 게 실제로 우주의 어딘가 별을 사는 사업이 생각보다 각광이라고 하더라. 여하튼 인간은 끝없는 욕심이 문제다. 하긴 지구가 너무 망가져서 어딘가로 가야 한다면 우주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만 우주는 우리에게 소유권을 준 적이 없는데 말이다! 이건 보통 노동의 대가와도 전혀 다른 문제다. 주인이 없으면 무조건 내 것이고, 온갖 곳에 가서 인간의 자취를 남겨야 한다니.

신대륙 발견으로 유명했다는 콜럼버스가 사실은 돈과 사람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하듯, 후손들도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우주에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의 역사에서는 인간이 거쳐간 곳에는 폐허뿐이라고 남을 지도 모르겠다. 음, 다시 보니 내 미래관이 좀 울적한 듯도 싶고. 내 입장은 그렇다. 개발은 지금도 차고 넘치진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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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도 직업에 넣는 날도 오려나


과거, 현재, 미래의 범위가  애매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 아쉬웠다. 미래는 현재 이후의 어느 시점이라고 생각해도 되지만 과거와 현재의 경우는 명확하게 구분했다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을 것 같다. 또한 사진 배열에서 과거, 현재, 미래로 큰 틀이 나눠져 있기 때문에 현재 부분에서는 현재 위주의 사진을 주로 배치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현재 부분에서도 과거, 고대의 사진이 배치된 경우가 있었다.

세상에 수많은 직업을 백과사전처럼 다 다룰 수는 없고, 작가가 전지적 인간 시점으로 잘 엮어내어 마지막까지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벌써 이만큼 읽었나? 책을 덮으면 내가 376쪽이나 읽었다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부담스럽지 않다.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면 가볍게 시작하는 선으로도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가볍고 넓게 다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거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 부분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아니라 듣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직접 그 직업이 되어보지도 않았지만 상세한 묘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할아버지 선생님이 읽어주시던 옛날이야기책이 생겨났다. 하나만요, 하나만 더 읽어주세요 했던 느낌이 든 건 오랜만이었다. 그때는 선생님이 이야기를 말투를 바꿔서 말씀해주시는 줄 알았는데, 궁금해서 사보니 그 책이 대화체였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편안함과 재미를 느낀 건 대화체 말투 덕분이었을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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