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희] 01. 당신의 예술은 안녕하신가요?

대체 무슨 글인지 알려주는 프롤로그.
글 입력 2019.07.1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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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것 참 예술이다.”



도대체 예술이 뭐길래.

 

“이거요, 음식 플레이팅 참 예쁘지 않나요.”

“정성이 느껴지네요. 먹기 아까워요.”

“요즘은 음식만 잘 만들면 끝! 이렇지가 않아. 먹음직스럽게 꾸미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음식 만드는 것도 예술이라니까요. 이런 거 보면 무슨 미술 작품 보는 것 같아.”

“음, 그런가요. 맞아,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


*

 

하다하다 요리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는 시대가 왔다. 요리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축구선수가 선보인 환상적인 플레이나,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며 예술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요리나 스포츠, 자연현상‘도’ 예술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건, 이들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예술로 규정되었던 분야들이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통 예술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미술이나 음악, 건축과 관련된 작품들, 또는 작가들이다. 예를 들어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흩뿌리는 화가들, 그 화가들의 창작물. 그리고 엄선된 창작물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까지. 물론 예술을 정의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미술 작품은, 어떤 음악 작품은 예술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작품이 만들어지고 그 작품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기 직전까지, 그것은 예술이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연히> 예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 작품은 예술이 아니야. 속았지? 왜 예술이 아니냐면—” 이런 맥락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예술의 이미지는 오래 전부터 예술이라는 틀에 포함되어 온 분야들로부터 만들어졌다. 음악과 미술, 건축, 문학. 각각의 분야마다 ‘○○주의, ○○적 이념’ 등으로 일컬어지는 다양한 사조가 존재한다. 사조의 수가 다양한 만큼 이로부터 만들어지는 작품들도 굉장히 많고, 작품들 하나하나에 담긴 특징들도 천차만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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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탈리아에 갔을 때 방문했던 부라노 섬.
알록달록 원색으로 가득한 건물들.
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방이 물 천지라.



개중에는 이게 과연 예술이 맞나, 어떻게 이런 작품까지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나, 싶은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자명한 사실은, 작품들이 앞서 언급한 상위 분야 중 하나에 속한다는 점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 해당 작품이 예술일 가능성이 ‘높다’는 개연성이 사전에 부여된다. “일단” 음악이라는 점에서, 미술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하나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정말 예술 작품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열띤 논쟁을 벌이는 건 그 후의 일이다. 이미지의 힘은 강력하다. 사전에 아무런 검증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단지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특정한 자격이 생기니 말이다.

 

차라리 이 이미지가 이데아처럼 고정불변하다면 골치가 그나마 덜 아플 것이다. 문제는 현대예술은 앞서 구구절절 설명한 예술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 또한 내재하는 상황이다. 꼭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예술이라고 불렸던 것들만이 예술인지,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면서도 예술일 수는 없는지와 같은 물음들. 그래서 스포츠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이야기에 제대로 된 반박을 제공하기도 어렵다. 음악, 미술, 건축. 당연히 예술이지. 그런데 우리 집에 있는 쓰레기통도 예술일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라고도 맞다고도 못 한다. 이름 붙이기 나름인 세상이다. 어차피 미술도 음악도, 시기상의 차이가 있을 뿐 예술이라고 ‘규정’된 것이라면 여타의 것들도 그렇게 규정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오브제라는 단어가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생활 속의 그 어떤 물건도 예술로 규정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일단 마음껏 갖다 붙여보자. 그것 참 예술이라고. 예술과 다를 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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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불편한 유토피아



전통적으로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었던 다양한 장르들을 비롯해서, 예술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분야들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대중이나 저명한 비평가들(또는 이에 준하는 권위를 지닌 자들)에 의해 예술로, 혹은 예술 작품으로 대우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이나 그에 준하는 가치를 지닌 모든 것들은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애초에 예술을 정의할 객관적인 기준을 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기준이 정해진다 하더라도 기준의 정당성을 입증 받을 창구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가 운용하는 제도나 규범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띨 순 있어도, 완전히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나 플로티노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이 부활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다원주의와 주관주의, 개인주의와 같이 개인의 독립적인 자아와 내면이 중시되는 시대다. 사유의 시작점과 주체는 나 자신이다. 내 마음에 드는 것,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등—나에 대한 것부터 고민을 시작하여 궁극의 진리나 이상향 같은 보편의 차원으로 논의를 확장시켜야 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르는 게 아니라, 일단 나 자신이 무언가를 보고 내적으로 감동을 받든, 영감을 받든, 쾌나 불쾌를 느끼든 해야 한다.

 

문제는 그 이상으로 논의를 확장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유를 정확하게 알긴 어렵지만 도덕적 법규나 사회제도를 정할 때와 달리 예술에 관한 보편적인 정의를 확립하기란 대단히 까다롭다. 딱히 그렇게까지 안 해도 인생을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일까, 그렇게 보편의 기준을 만들기엔 개개인의 선호가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서일까. 어찌 되었건 논의의 폭이 확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확장을 하더라도 끊임없는 반론으로 인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다.) 예술은 불편한 유토피아다. 논의의 배경이 현대인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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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점 투시법 장인 될 판이다.


 

귀에 끼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처럼, 오늘날은 예술이라는 말만 붙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 저명한 예술 잡지에 이름이 실릴 수 있는지, 대중성을 얻을 수 있는지 등의 문제는 뒤로 미루어두고, 일단 스스로 무엇을 예술이라고 선언하면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예술이다. 다른 사람들도 야유와 비판은 보낼지언정 자신이 어떤 무언가를 예술이라 여긴다는 생각 자체를 개조하려 들지는 않는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니. 깊게 고민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예술이라고 규정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예술 작품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니까,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 향유할 거리도 많아지고 진입 장벽도 낮아져서 좋은 것 아닌가? 그냥 얼씨구나 좋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나도 길고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 적성에 안 맞는다. 그래서 애써 외면해보려고 노력했다. 뭐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는데 그렇게 내버려두지 뭐, 나랑 생각이 좀 다를 수도 있지, 깊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닌데 그냥 예술이라면 예술인 줄 알고 공부하자. 갖가지 합리화를 시도해보며 불편한 시선을 거두려고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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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셋.

저의 예술은 안녕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모두 실패했다. 태생부터가 삐뚤어진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이름만 붙이면 예술이 될 수 있는 세상,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이 날뛰는 현재. 하루가 멀다 하고 탄생하는 작품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예술가들.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 작품’이라는, ‘예술가’라는 규정이 난무하는 현실. 마치 쓰나미를 방관하는 기분이다.


물론 재난이 발생한 와중에 그것을 물리적으로 멈출 방법은 없지만, 가만히 손 놓고 사방팔방이 무너지는 순간을 구경할 순 없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막아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나에게 지금의 예술은 재난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작품들이 쏟아지는 상황이지만 유의미한 해결책이 없다. 그냥 받아들여라,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내용물이 예술이라는 포장지로 휘감긴다. 많이 휘감으면 휘감을수록 그럴싸한 작품이 된다. 단단히 포장해놓은 상자를 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포장지를 벗기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은연중에 분명히 상자 속의 내용물이 진귀하고 중요한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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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자에 담긴 내용물이 기대했던 바와 달리 지나치게 평범하다 하더라도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아, 이건 내 생각보다 더욱 가치 있는 물건이야. 내가 평소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렇게 일종의 자기최면을 건다. 예술작품이라 부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내가 평소에 고정관념이 심해서 이런 획기적인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라는 심리로 일관한다.


아니면 완전히 무시한다. 포장지를 뜯기가 귀찮아서 상자를 저 멀리에 떨어뜨려 놓는다. 뭐 이렇게 어려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예술이라 부르건 어쩌건 마음대로 하라지. 어느 쪽의 태도를 취하건 포장지가 두꺼워지는 데에 일조한다.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새로운 것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향유하고 즐길 거리들이 많아지고, 예술을 접할 장벽도 낮아진다는 거다. 부정하지 않겠다. 그렇지만 난 쓰나미를 무작정 방관할 생각이 없다. 모든 예술을 군말 없이 예술이라 인정할 만큼 마음씨가 넉넉하지 않아서, 난 최대한 불편한 시선으로 예술에 접근할 것이다. 과연 사람들이 향유하는 예술의 형태들이 과연 예술인지, 예술을 규정하는 기준들이 타당한지. 별것 아닌 주제도 깊게 파고들 수 있다.


상당히 길고 지루한 말들이 적힐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요소들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삐딱하고 불편한 인간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으리란 추론이 가능하다. 나는 삐딱한 사람이므로 후자에 가깝다. 앞으로 할 예술에 관한 이야기들도 상당히 염세적인 관점에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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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안국)

   


나의 예술은 안녕하지 않다.

이제부터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성격 삐뚤어진 한 사람의 주저리를 시작하고자 한다.



1. 한 발짝 삐뚤어진 미학도의

2. 한 발짝 불편한

3. 다소 게으르고 염세적인

4. 삐딱한 공상일지


"삐딱한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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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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