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레라미 프로젝트 - 마을의 평화를 유지했던 것은 [공연]

글 입력 2019.07.1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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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의 연극



연극이 시작되면 관객들은 당황할 수 있다. 연극 단원들이 커튼콜 때처럼 나와 ‘연극 단원’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레라미 프로젝트>는 `연극을 만드는 연극`이다. 그래서 액자 밖의 서사인 ‘1999년 레라미 마을 사람들을 취재하는 연극 단원들의 이야기’와 액자 속 서사인 ‘마을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극 속의 연극조차 연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인물 간 대화보다는 독백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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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 8명의 배우만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각 배우는 수많은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캐릭터의 특징을 잘 잡아서 표현한다.


같이 보러 간 친구는 인물들의 이름이 중요한 줄 알고 열심히 기억했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이름을 보지 않고도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인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고 했다. 미국 작품인 만큼 대사의 번역이 관건이었을 것 같은데, 영어의 특징적인 감탄사가 잘 느껴지면서도 관객들이 어색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잘 번역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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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평화를 유지하던 것은 무엇인가?



연극 속의 연극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느껴지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시작된다.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일 정도로 작은 마을인 레라미는 와이오밍 주의 남부에 있다.


`남을 건드리지 않으면 남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레라미의 주민들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더없이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연극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원칙은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매튜 셰퍼드 사건은 일부 개인의 일탈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원칙이 뜻하는 바가 연극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밝혀진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 ‘정상’이 아닌 것, 선을 넘은 것은 언제든지 폭력의 대상이 되기에 마땅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레라미 마을의 주민들은 수많은 동성애자를 쫓아냈고, 소득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으며, 다른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구분 짓고 배척했다.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침묵하고, 차별을 하는 이들은 차별 대상이 감사해 하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마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이는 비단 레라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시화되고 있는 소수자 혐오 문제는 그동안 없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모두 사회의 폭력에 침묵해야만 했던 이들의 목소리다. 소수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권리조차도 그들에게는 누리기 힘든 것이었다. 종교적 이유로 하는 표식에 대해 질문받지 않을 권리나 폭력을 멈춰 달라고 했을 때 맞지 않을 권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물었다. 호기심을 이유로 다른 이에게 상처가 될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경계를 설정하고 구분 지으려 하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실수로라는 말로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평생 겪어온 폭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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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관객의 몫



연극은 무작정 관객들에게 생각을 주입하지 않는다. 물론 혐오범죄를 다루고 있고, 연극의 취지만 보더라도 어떤 방향성을 가졌는지 뚜렷하나,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보다 그 주변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며 관객들이 직접 판단하게끔 유도한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다르지 않은데 피해자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자극적 보도가 난무하고, 가해자에게 지나친 처벌을 하려 한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매튜의 죽음을 계기로 레라미에 내재하여 있던 혐오가 가시화되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매튜의 죽음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사람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연극을 보기 전 매튜 셰퍼드 사건을 조사했을 때만 해도 내 생각은 확고했다. 혐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처벌받아 마땅하고, 마을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극의 결론도 비슷한 방향성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기사로만 이 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너무 일차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이 ‘천사 행동’을 보여준 매튜 셰퍼드의 친구들이나, 피고의 감형을 요청한 유가족들만큼 성숙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수자의 문제가 주목받고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게 된 데 언론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사람의 죽음의 무게가 다르지는 않겠지만, 매튜 셰퍼드 사건 이후 혐오범죄에 대한 명시적인 법이 등장하기까지도 10여 년이 흐른 것을 보면, 이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 막히는 여름, 시원한 공연장에서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듣고, 사회에 내재한 폭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과장적이지 않게 사건을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어 상당히 잘 만들어진 사회극이라 느꼈다. 문화 차이가 존재하나, 오랜 시간 존재했던 소수자를 향한 편견에 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채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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