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뚜렷한 경계선 속에서 마주하게된 아이러니한 모호함, 그때 변홍례

글 입력 2019.07.19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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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소리를 낸다는 것은 대단히 자기주도적인 과정이다. 대상은 표상을 머리속에서 떠올리며, 표상을 언어로 바꾸고, 바꾼 문장을 작업기억 속에서 유지하고 마침내 목울대를 울려 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낸다는것은 단순히 말소리 언어를 산출한다는 것이 아니다. 관용어처럼 사용되듯이, 보통 말한다는 것은 같은 언어 이용자들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뚜렷한 목적성을 띄고 있다.


표출된 의지와 표현은 사회 속에서 다시 구성되어 보여지는 '나'를 만든다. 말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말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필자는 이 문장이 절대적인 인과관계에 있다는 확언보다는 그 치밀한 관계망에 대한 고찰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하여튼 이 신비로운 과정은 신체 범위 안에서 맴돌던 자아를 확장시키기도 하지만, 수많은 왜곡과 오해를 만들기도 한다. 필자가 지난 글에서 반복했듯이,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선택한 것을 선택한다고 생각하곤 하지 않는가. 이처럼 연극 <그때, 변홍례>는 '말'을 다룬 연극이다.


연극은 연극 매체의 말의 특징을 뚜렷히 드러내면서 실제 생활의 말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뚜렷하게 세워진 경계선은 그 두 가지를 구분시키기는 커녕, 우리의 '말'이 정말 연극의 '말'과 다른지를 돌아보게 한다. 명명하고 명명된다는 것은 결국 삶의 욕망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결국 우리는 정말 우리의 삶을 살고있는가로 나아간다.

<그때, 변홍례>는 당시의 언어로 명명되어진 변홍례를 다시 극단의 언어로 관객들에게로 불러들인다. <그때, 변홍례>는 말소리를 내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현실과 비슷한 모양새를 재현하는 연극매체로 옮김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상을 느끼게 한다. 연극에서 배우들은 똑같이 '말'을 하지만, 배우는 그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해 다른 표현자의 언어를 표현할 뿐이다.


연극의 이런 매체적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 극단은 적극적으로 '변사'를 등장시킨다. 변사들은 등장인물의 말을 다분히 오버스럽게 표현하고, 여러가지 소품의 소리를 재현한다. 연극의 시작과 끝을 알리고, 의도적으로 화면을 바꾸기도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연극이 단순히 재현된 현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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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연극답게 만드는 부분에서는 두가지 연출이 인상깊었다. 우선 배우들의 분장 과정을 관객들에게 오픈하고, 배우들의 입장을 명백히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뚜렷히 세워진 경계선은 오히려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더 흐릿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잃은 등장인물인 변홍례와 관련해 후술하겠다. 연극에 대한 연극에 대한 서사는 이미 다양한 연극에서 많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감히 등장인물의 목소리, 배우의 목소리, 실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해석할 수 있게 했던 연극은 <그때, 변홍례>가 처음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인상 깊었던 두번째 연출은, 그림자의 사용이다. 그림자는 우리를 비추지만, 빛에 따라 커보이기도 하고 작아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을 나타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이미 플라톤이 그 특유의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였고, 부처는 모든 것이 변하기에 공허하다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그림자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부분으로는 변홍례를 욕망하는 주인의 확대된 그림자다. 작은 변홍례와 비교해 그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 세계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확대된 그림자일뿐, 그도 변사가 대신 말을 해주는, 욕망에 조종당하는 보잘 것없는 인간 중 하나였을 뿐이다.

충실히 연극 매체의 특징을 이용하고 있는 <그때, 변홍례>지만, 연극은 결코 우스꽝스러운 재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주인공 변홍례다. 변홍례는 홀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그는 현실의 인물처럼 결코 말소리의 크기와 감정을 오버하지 않는다. 그녀의 모습은 당시 하녀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그대로 빼다박았다.


만약 연극이 연극 매체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그 경계를 확고히하기만 했다면, 변홍례도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췄다면, 이미 수많은 극단에서 시도한 연극의 매체적 특징에 대한 서사는 별달리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연극에서 변홍례는 홀로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비참한 사회적 상황과 그녀 개인의 일화가 겹쳐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다. 그녀가 중심이 되지 않고 욕망이 중심이 된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하고, 오버스럽고 우스꽝 스럽게 행동한다. 그녀도 이 연극의 일원이 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생물의 본질인 허기진 의지(연극에 비추어보자면 욕망)가 자기자신을 먹어치우며 끊임없는 연쇄에 빠진다고 이야기했다. 이 굴레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의지는 상호간의 투쟁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갖기 때문에 끝이 없다. 그 삶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비참한 일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관객들은 변홍례가 목소리를 잃은 순간부터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반성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목소리야말로 변사가 대신 읇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원하지 않은 것을 원하고, 끊임없이 스스로 파먹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는가? 이 시점에서 삶과 연극의 경계선은 모호해진다.

대한민국의 비참한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어필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욕망의 꼭두각시일뿐이니 누가 특별한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시대에 살건 사람들은 욕망하고, 욕망에 휘둘린다. 프리뷰의 제목으로 삼았듯이, 연극은 그저 내달리는 욕망을 관조할 뿐이다. 어줍잖은 위로와 교훈 대신 연극으로서의 특징을 뚜렷히 드러낸 극단 하땅세의 시도는 좋은 평가를 받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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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변홍례
- 2019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 -


일자 : 2019.07.13 ~ 07.21

시간
평일 20시
토 15시, 19시
일 15시
월 쉼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
하땅세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연령
만 15세이상

공연시간
80분





극단 하땅세


하늘부터 땅끝까지 세게 간다.

극단 하땅세는 <그때, 변홍례> ,<위대한 놀이>, <파우스트l+ll>, <파리대왕> 과 같은 개성 있는 작품을 창작하며,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로부터 호평뿐만 아니라 국내외 유수의 연극제에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 등을 수상한 극단이다. 처음에 간직한 '하늘부터 땅끝까지 세게 간다.'는 강한 정신과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고, 세상을 살핀다.'는 공동체 작업을 통해 터득한 사유의 정신으로 창작하는 극단이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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