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술이라는 문을 열고 나와 만나다 [도서]

글 입력 2019.07.20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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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악 듣기’가 수시로 적혔던 학창 시절 친구들의 취미란에는 미술에 관련된 것이 적히지 않았을까. 만화 캐릭터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유행하던 딱지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때때로 ‘그림 그리기’가 취미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새인가부터 남들이 자주 언급한다는 이유로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취미로 적어 넣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런 지루한 것들로 나를 정의해야 할 만큼 창피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사생대회에서 정성껏 그린 풍경이 상을 받지 못한 쓰레기가 되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혹은 상상력이 좋다고 칭찬을 받곤 했던 미술 시간이 고등학교에서는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만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에 ‘내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림과 멀어졌다.

그런 내가 대학에 와서 미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은 호기심에 들었던 미술사 수업에서 주야장천 강조되었던 현대미술의 다양성이 전해주는 위로 때문이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현대미술은 아무리 실제와 닮지 않아도, 만화 캐릭터와 딱지를 그려도 예술이라고 해주었다. 예전처럼 그림을 자주 그리진 않아도 미술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 있게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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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홍, 그림으로 자기를 찾아가다>는 미술치료사이자 저자인 김은진 교수를 만난 직장인 ‘홍’이 미술로 자신을 파악하는 과정을 대담의 형식으로 담아낸 책이다. 김 교수가 미술에 대해 생소한 설명을 하는 동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어렵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홍’은 현대미술을 마주하며 수없이 당혹감을 느끼는 우리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점차 그림을 그려가며 ‘홍’의 캔버스에 하나둘 채워지는 확신은 그가 미술을 알아가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홍’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홍’에게 미션처럼 주어지는 그림 과제들은 따로 마련된 지면으로 독자에게도 주어진다. 독자는 선을 긋는 아주 단순한 작업부터 시작해서 만다라를 그리거나 더 나아가 정물화나 자화상, 풍경화까지 그리게 된다.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예쁘게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대면하라는 교수의 격려에 점차 그것을 내려놓게 된다. 가장 어렵다고 생각해 시도조차 해본 적 없는 자화상을 그릴 땐 너무도 신나서 결과물을 이리저리 자랑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지면에는 그림에 대한 간략한 해설 혹은 블로그에 그림을 찍어 올리면 교수의 느낀 점을 확인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 있지만, 당연히 정답은 없다. 그림의 결과보다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것을 느꼈고 어떤 경험을 떠올렸는지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자화상을 그리는 지면에서는 얼마나 자신의 얼굴을 ‘잘’ 그렸는지, 즉 얼마나 실제와 닮게 그렸는지 묻지 않는다. 가장 맘에 드는 부분과 가장 불편한 곳이 어딘지를 궁금해할 뿐이다. 그림을 그리고 느끼는 나 자신의 반응이 여기서 가장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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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각자 지문처럼 다르다. 완벽히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모서리를 깎아낸다. 특히 말이나 문자와 같은 체계로 재정립되면서 그 모서리는 더욱더 둥글어지고 이것에만 골몰했을 때는 모두가 똑같은 동그라미가 되어 구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미술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아는 과정은 특별하다. 같은 주제를 던져줬을 때 나는 그 누군가와도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못’ 그릴지언정, 모서리를 잃지는 않는다. 나는 타인과의 차이 속에서 정의되고, 미술은 이 차이에 주목한다.


“그런데 나는 그 왜곡되는 부분만큼이 홍의 존재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나는 미스 홍이 망치게 될 꽃이 어떨지 더 궁금해. 그것이 바로 미스 홍이 만난 꽃이잖아.”

“내가 외면하고 미워하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이로운 일이야.”


이성의 체로 거르지 않은 날것의 감각들이 중구난방으로 펼쳐진 지면을 보았을 때 당혹스러운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곧 왜 이런 그림이 그려졌는지 이해하게 된다. 예를 들면 노란색 파스텔을 들고 색을 느끼며 아무 그림이나 그리라는 부분에서는 아지랑이가 어지럽게 피어있는 듯한 형상을 그렸는데, 그림을 그리고 나서 무엇이 떠오르는지 생각해보니 아주 어릴 적 살았던 아늑한 방에 햇살이 들어오는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사소한 행복이라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던 기억이 그림을 통해 여과 없이 눈앞에 펼쳐졌다. 지금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상념이 뾰족한 모서리처럼 마음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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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을 주제로 그린 그림


왜곡되고 구부러진 선을 나의 본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라는 조언에 더욱 신뢰가 갔던 이유는 김 교수의 끊임없는 격려뿐 아니라 예시로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에도 모두 자신을 찾아가고자 했던 분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감정을 색을 통해 표현했고, 피카소와 세잔 그리고 이집트의 초상화가들은 자신의 시점으로 세상을 재정의했으며, 고흐와 윤두서는 자화상을 통해 뚜렷한 자의식을 드러냈다. 컨스터블과 터너 그리고 김정희는 풍경화로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표현하고자 했고 백남준과 이불은 자신의 행위를 재맥락화하며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들은 자신만의 모서리를 간직함으로써 세상에 저마다의 흔적을 새길 수 있었다.


“만약에 홍의 그림에서 무언가 근사한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그냥 그림 자체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고 하는 사람은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홍과 관련 있는 어떤 울림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미술과 멀다. 어떤 게 좋은 그림인지 나쁜 그림인지 잘 모르겠다. 낙서처럼 주변 사물을 따라 그릴 때도 실제와 비슷하지 않으면 이내 그만두게 된다. 미술을 공부한 지 3년이 다 되어가지만,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

그러나 미술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미술을 통해 나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림 너머에 있는 사람을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미술을 알아갈수록 나를, 사람을 알아가게 된다. 사생대회에서, 미술 시간에, 대학교 미술사 수업에서 칭찬을 듣지 않는, 근사하지 않은 나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진정 미술이 갖는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미술은 더 많은 학생의 취미란에 자연스럽게 자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름다움은 대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대상과의 만남을 존중하는 행위에서 나온다는 저자의 말을 떠올리며, 모두가 저마다의 모서리로 아름다운 획을 긋는 날이 오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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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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