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해라는 착각, 야만의 기준 [영화]

제인 캠피온, <피아노 (1993)>
글 입력 2019.07.2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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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는 삶이 선택한 걸까?”


- 에이다의 나레이션에서





이해라는 착각


알면서도 잘 안되는 것들이 있다. 바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다. 늘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며, 남을 위한다는 일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로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상대방이 사회적 약자라면 존중의 행동보다는 자신의 우월감을 내세워 깔보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약점을 지닌 사람 앞이라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진다. 상대방의 이해보다는 내 관점에서 상대방을 해석하며 자신만의 기준에 상대방을 대입하여 판단하려고 한다. 판단 기준에 강박관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불량, 한량으로 판단하고 마치 자신의 삶이 옳은 듯 설교하기도 하며, 폭력을 사용해 강압적인 제압을 시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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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주인공 에이다는 어쩌면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시대적으로 여성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시대도 아니였고, 신체적으로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또 사회적으로 결혼도 안했는데 딸까지 있는 미혼모였다. 한마디로 ‘불행’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녀에게 그나마 의지가 되었던 인물은 자신의 딸과 피아노였다. 이 두 매개체는 영화를 뒤흔드는 요소가 된다.


딸은 나이가 어리다는 속성을 이용하여, 순수한 나머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매개로, 피아노는 불행한 삶을 그나마 해소시켜주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불행을 야기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각각의 매개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인데 그게 에이다에게 불행을 가져다줬다고 할 수 있다. 딸은 자신의 나이에 맞는 순진함과 순수함을 보여줬고, 피아노는 연주자의 손가락에 맞춰 연주가 되었을 뿐이었다.


물론 피아노의 경우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나중에 스튜어트(문명화된)와 베인즈(문명화를 거부한)의 중간기점으로 언급되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는 이런 매개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상대방의 태도에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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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남자는 두 명이다. 스튜어트은 남편으로 에이다를 뉴질랜드로 부른 장본인이었다. 어찌보면 이 사람이 새로운 불행의 시작이며 이방인의 이방인(타자의 타자로 설명될 수 있다)이라는 위치를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남자이다. 그는 영국 청교도식 가정에서 자라온 듯 하고 독실한 신자인 듯 하다. 그리고 서구 문명으로 상징될 수 있는 정돈을 중요시하며, 강압적인 태도로 에이다에게 접근한다. 본인은 조금의 시간적 여유를 주는 척을 하며 에이다를 이해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조급함을 띄고 에이다를 위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행동이 영화초반의 결혼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치지만 스튜어트는 미루지 않고 에이다와 사진을 찍는다. 온지 얼마 안 된 에이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또 그가 에이다에게 행한 태도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이 역시 영화의 초반, 스튜어트는 에이다의 피아노를 매정하게 버려두고 온다. 피아노는 앞에서 말했듯 에이다의 입(口)으로 상징되는 중요한 매개체였고, 자신의 욕망을 배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에이다가 탁자에 피아노를 그리고 치자 그녀를 정신병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왜?’ 라는 의문은 스튜어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에이다가 왜 피아노에 집착을 하고 치고 싶어하는지 관심밖이였고, 하루빨리 정상적으로 자신과 친밀하게 지내기를 원했을 뿐이다. 새로운 삶을 원했던 에이다가 다시 불행해진 것도 스튜어트의 이러한 태도였다. 그 버려진 피아노를 취한 남자가 바로 남은 한 명의 남자 베인스였다.

베인스는 스튜어트와 반대의 지점에 있는 남자였다. 마오리족을 돈을 주고 사려는 스튜어트와 달리 직접 얼굴에 마오리족 문신을 하고, 대화도 하고 공감하려는 사람이었다. 이방인을 그냥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스튜어트와 달리 베인스는 스스로 동화되고, 융화되는 인물이었다. 에이다를 이해한 것도 바로 그녀가 피아노에 관심을 보이고, 피아노를 칠 때 행복한 얼굴을 봐서 일 것이다. 그의 상대방을 이해하는 태도는 에이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고 에이다는 그를 나쁜 사람이 아닌 정을 주어도 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은 투박했고, 변태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베인스의 이 변태적인 과정도 스튜어트에 비교하면 솔직하고, 진심어린 행동이었다.


스튜어트는 청도교식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표현하지도 못했고, 이후에는 그러한 억압 때문에 강압적인 성격을 띄게된다. 부자연스러웠다. 베인즈는 자연스러웠다. 좋아함을 숨김 없이 표현했고, 에이다도 나중에는 피아노 거래 때문에 진심으로 베인즈를 대해준다. 이는 이 섬(뉴질랜드)에서 자신의 피아노 소리(口)를 들어줄 유일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들어줄 사람이라고 규정지었던 것이다. 정반대에 있었던 두 남자의 대립은 어쩌면 영화에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에이다의 밀회(密會)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딸의 솔직한 발언과 행동에 의심을 하게 된 스튜어트는 이 둘이 교감하는 장면을 지켜보게 된다. 정확히는 훔쳐보았다.

스튜어트는 이때부터 ‘자신에게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추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베인스에게 확신을 갖고 있던 에이다는 스튜어트에게 아무런 반응을 주지 않았다. 에이다에게 스튜어트는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못 할 사람이었다. 피아노까지 스튜어트의 집에 도착했지만 에이다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꿈 속)에서 연주한 피아노가 유일했다.


에이다는 그래도 형식상 자신의 남편이기에 몇 번의 기회를 준다. 스튜어트가 잠자는 동안 애무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행동은 제한되었고 억압되어 있었다. 진심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스튜어트는 에이다에게 관심을 갖게되지만 에이다는 스튜어트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감금이 풀린 에이다는 다시 베인스를 찾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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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망가진 피아노와 동시에 손가락을 잃게 되는 에이다가 어떻게 여생을 살았는지 환상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베인스와 배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면 해피엔딩이겠지만, 마지막 대사를 보고 유추했을 때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피아노와 수장된 본인의 이미지는 본인의 욕망에 대한 분출을 완전히 억눌렀음을 의미하고 한다. 즉, 체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모습을 그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베인스는 죽었고, 그와 함께 떠나는 것은 본인의 상상일 뿐일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몰이해는 비극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에게 치중된 이해는 피아노라는 매개를 불러들이지 못했고 한 사람을 파멸시켰다. 영화이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만,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강압적인 사람 한 명 때문에 전체적으로 피해보는 일도 있고, 부부사이에서 강압적인 한 명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도 있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사람을 얻을 수 있다. 스튜어트가 처음에 에이다를 이해하고 피아노를 가지고 왔으면 누군가의 불행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만의 기준


이 영화는 작게 보면 개인들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강압적인 서구문명과 흐트러져 있지만 자연스럽고, 숨김 없는 마오리족의 대비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 두 진영의 대표인물은 스튜어스와 베인스이다. 그 중간에는 피아노를 치는 에이다가 있다. 스튜어스는 역사와 전통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의 땅을 늘리려고만 한다. 마오리족은 그냥 장애물이며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이해와 융화보다는 과거 서구문명들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그렇기에 스튜어스느 기계적이고 정돈되어 있으며, 강제성을 띄고 있다. 베인스는 반면에 물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여유가 있고 흐트러져 있으며 자연스럽고 신체적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야만에 가까운 사람은 베인스이다. 깨끗한 곳에서 사는 곳도 아니고 쉽게 옷을 벗기도 한다. 문명화된 스튜어트는 깔끔하게 머리도 빗고, 깔끔한 옷도 입는다. 하지만 이 둘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야만은 베인스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깔끔한 스튜어트의 행동이 야만적이다. 도끼를 들고 피아노를 내리치고, 그 위에서 에이다의 손가락을 내리치는 장면은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적인가? 소위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이 했다고는 말하기 민망한 상황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모습과,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러 가는 모습은 야만을 넘어서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으로도 해석된다.

아직도 야만의 기준은 옷을 입고 안 입고에 결정되는 것 같다. 영화는 야만의 기준의 재조정을 촉구한다. 결국 문명화된 사람이 야만적이며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사람임을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노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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