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들의 은신처, 자르브뤼켄

글 입력 2014.03.0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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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열 3월.jpg


프랑스 알자스 로렌 지방과 면해 있는 독일 자를란트주의 주도인 자르브뤼켄은 나에게 음악의 숨은 비경을 간직한 은자들의 도시다. 그 곳은 일찍이 정명훈이 스승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추천으로 첫 수장을 맡은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을 품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어쩐지 나에게는 쉽사리 가지지 않는 도시가 자르브뤼켄이었다. 2000/2001 시즌에 자르브뤼켄과 기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프랑스 로렌 지방의 낭시에 아홉 달 동안 머물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자르브뤼켄에 들르지 않았다. 그 곳에는 어쩐지 을씨년스런 탄광지대와 잿빛으로 우중충하게 그을린 스산한 하늘만이 나를 반겨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흡사 사람이 아닌 유령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내가 자르브뤼켄에 대해 품고 있던 막연한 망상들이었다.


그런 자르브뤼켄을 처음 찾은 것은 낭시 체류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2008년 11월에 이르러서였다.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오후, 나는 파리 동역에서 자르브뤼켄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르브뤼켄행을 그제서야 성사시킨 까닭은 그 다음날인 11월 16일 일요일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에서의 마티네 콘서트 무대에 스타니수아프 스크로바체프스키(1923- )가 등장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현역 최고령 지휘자로서의 아우라에 휩싸여 있는 스크로바체프스키는 반드시 목전에서 지휘모습을 만끽해야 할 명장이었다. 그런 스크로바체프스키가 명예지휘자의 자격으로 이 날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2007년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과 카이저슬라우테른 방송 교향악단과의 합병으로 새롭게 출범)를 지휘한다니 놓칠 수 없는 무대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공연 전날 자르브뤼켄에 발을 디딘 나는 자르브뤼켄 중앙역 인근의 여관에 체크인하며 다음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찾은 중앙역 주변의 식당에서는 온통 겨자에 버무린 소시지와 감자튀김만을 팔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나는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오물거렸다. 그런 연후에 본격적으로 둘러본 인구 18만의 자르브뤼켄은 참으로 멋이라곤 느낄 수 없는 황량한 도시였다. 늦가을녘의 자르브뤼켄 거리는 음산했고 사람 사는 생기도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적막하게 우지짖는 까마귀 울음소리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남은 마른 가지의 가로수들만이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었다. ‘자르의 다리’=자르브뤼켄 시내를 관통하는 모젤강의 지류, 자르강만이 그나마 적요한 심사를 달래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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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자르브뤼켄에는 그러나 풍성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 외관.png▲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 외관 (사진출처-Congress-Centrum Saar GmbH)


그런 자르브뤼켄을 나는 하루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스크로바체프스키만은 목격하고 떠나야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자마자 나는 자르브뤼켄의 아침공기를 만끽하며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까지 걸어갔다. 다행히 콘그레스할레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막상 첫대면하고 보니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본거지인 콘그레스할레는 매우 수수한 외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독일의 연주회장 치고 화려하거나 강렬한 임팩트로 나를 반겼던 곳은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서유럽의 연주회장들에 비해 독일 각 도시의 콘서트홀들은 전혀 멋을 내지 않은 수수하면서도 검소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니가 그랬고 뤼베크의 무지크 운트 콘그레스할레가 그랬으며 슈투트가르트의 리더할레가 또한 그랬다. 뮌헨이 품고 있는 대표적인 두 음악명소, 가슈타이그와 헤르쿨레스잘의 외양도 별 볼일 없었다. 이왕이면 내관 뿐 아니라 외관도 멋스럽게 치장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등 다른 서유럽 국가들의 연주회장들에 비해 독일인들은 그 같은 치장을 일종의 사치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이들 게르만인들은 철저히 내실만을 추구하는 실속파로 나에게는 비쳐진다.


그렇게 무감한 첫인상으로 나를 맞이한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의 중앙현관을 들어서서 나는 미리 예매해둔 표를 찾고 1층 객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18만 소도시에서 펼쳐지는 일요일 오전 11시 공연인데도 1300석의 객석은 만석으로 가득찼다. 미술이나 영화 같은 시각예술보다 귀로 만끽하는 청각예술을 더욱 상위에 두는 독일인들다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니 단원들이 무대를 점거하자 드디어 85세의 스크로바체프스키옹이 포디움을 향해 무대 왼편 뒤의 문으로부터 걸어나왔다. 그야말로 거장의 현전이었다. 객석을 향해 잠시 머리를 조아리고 난 후 이내 돌아선 스크로바체프스키옹은 폴란드의 20세기 선배작곡가 루토수와프스키의 ‘간주곡’을 유유자적 열어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당시의 스크로바체프스키옹은 구부정한 허리와 금방 쓰러질 듯한 앙상한 뼈마디로 위태위태한 노인의 풍신이었다. 걸음걸이만은 비교적 정정했다. 루토수와프스키의 ‘간주곡’을 스크로바체프스키는 시종 가느스름한 현의 이음새로 조용히 이어나가고 있었다.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 내부 객석과 무대.png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 내부.jpg▲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 내부 객석과 무대 (사진출처-Congress-Centrum Saar GmbH)



그렇게 루토수와프스키가 끝나고 이어진 시마노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알레나 바예바 협연)에서 스크로바체프스키는 관록의 대가다운 진한 향내를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노장의 그윽한 향기였다. 그리고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이 나에게는 최고의 명연이었다. 특히 1악장 전개부의 두께와 밀도가 천의무봉이었고, 2악장의 레가토도 전대미문의 유장함으로 일관했다. 4악장의 화력도 85세 노인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 믿기 힘든 들끓는 연소로 일관해 충격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날 들은 스크로바체프스키의 지휘무대가 여지껏 들은 베를린 필이나 빈 필,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같은 특급악단의 무대들보다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독일 중소도시의 마이너악단이라 해서 폄하해서는 안 될 노릇일 뿐더러,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령의 야인이 지휘한 무대라 해서 또한 얕잡아 볼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 날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에서 절감했다.


자르브뤼켄 콘그레스할레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디터 외스테를렌이 설계해서 1967년 개관한 연주회장이다. 1300석의 객석수를 보유하고 있지만 객석을 모두 입석으로 전환하는 장치를 가동하면 18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홀이다. 1967년 개관했지만 1995년 현재의 입지로 옮기면서 지금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2007년 리노베이션 공사를 거치면서 보다 말끔하게 단장했으며 연주회 외에 모임이나 회의를 위한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이 외에도 자르브뤼켄에는 대중음악과 복합공연을 유치하기 위해 1967년 지어진 6500석 규모의 공연장, 자를란트할레가 또한 존재한다. 밥 딜런, 메탈리카, 핑크 플로이드, 스팅 같은 대중 뮤지션들이 그 동안 이 무대를 거쳐갔다. 콘그레스할레와 자를란트할레를 묶어 ‘자르 콘그레스 센터 유한회사’(Congress-Centrum Saar GmbH)로 1995년 새롭게 출발한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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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브뤼켄 자를란트할레 내부.png자르브뤼켄 자를란트할레 외관 과 내부 (사진출처-Congress-Centrum Saar Gm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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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브뤼켄의 숨은 오페라전당, 자를란트 국립극장



자를란트 국립극장 외관.png▲ 자를란트 국립극장 외관 (사진출처-Marco Kany)


그리고 자르브뤼켄은 자를란트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극장인 자를란트 국립극장을 또한 보유하고 있다. 히틀러의 제3제국 치하이던 1937년에 건축을 시작해 이듬해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으로 개관한 자를란트 국립극장은 그러나 2차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완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개관 당시 히틀러 휘하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입석 하에 히틀러가 추종했던 바그너의 오페라로 개관무대를 가졌을 만큼 이 극장은 태생부터가 히틀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재건축된 자를란트 국립극장은 현재 875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객석을 갖추고 자르강 한 켠에 유유히 서 있다. 이후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개보수 공사가 진행되어 극장의 사정은 한결 개선됐다. 이 곳에서는 오페라와 오페레타, 코메디 뮈지칼, 연극, 발레 등 거의 모든 극음악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자르브뤼켄 란트베르 광장에 있는 240석 규모의 알테 포이어바헤는 자를란트 국립극장의 분관이다. 이전까지 체육관이었던 건물을 1982년부터 공연장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주로 연극극장으로 쓰이지만 발레무대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 외에도 소극장 개념으로 활용되는 100석 규모의 스파르테4가 자를란트 국립극장의 또 다른 분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자를란트 국립극장 내관 copy.jpg▲ 자를란트 국립극장 내관 (사진출처-Marco Kany)


자를란트 국립극장에서는 매 시즌 10여 편의 오페라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무대들이 펼쳐진다. 당장 이번 2013/2014 시즌에는 10편의 오페라와 4편의 연극, 8편의 발레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무대들이 자를란트 국립극장에 올라가고 있다. 특기할 것은 자를란트 국립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에 둥지를 튼 악단이 자를란트 국립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이다.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는 별개의 악단으로, 2009/2010 시즌부터 가미오카 도시유키가 음악총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들은 자를란트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발레, 코메디 뮈지칼 반주를 하는 것 외에도 콘그레스할레에서 연간 열차례 가까운 관현악 무대를 연주해 오고 있다. 실내악 연주회와 어린이 음악회 등도 개최하면서 자를란트주의 음악생활에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해 오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 자를란트 국립극장이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 때가 있었다. 바로 테너 배재철이 2005년까지 주역가수로 활약했던 오페라극장이 자를란트 국립극장이었던 것이다. 갑상선암에 걸려 활동을 중단하게 될 때까지 이 걸출한 한국 테너가 주인공으로 무대를 누비던 극장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한결 자르브뤼켄에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스산한 대기와 우울한 잿빛 하늘, 황량한 거리풍경이 자르브뤼켄을 처음 찾은 나를 맞이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만 자르브뤼켄에 중독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2009년 1월 9일 금요일 당시 78세의 명장 귄터 헤르비히가 지휘하는 도이치 라디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들으러 나는 다시 자르브뤼켄을 찾고야 말았다. 이처럼 자르브뤼켄이 내민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한 나는 이후 의식적으로나마 자르브뤼켄을 멀리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만큼 자르브뤼켄에 중독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김승열 프로필 뉴.jpg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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