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춘향의 도시, 카를스루에

글 입력 2014.04.0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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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4일 수요일 새벽녘, 나는 파리 동역에서 독일 카를스루에(Karlsruhe)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카를스루에를 찾은 이유는 두가지였다. 우선 그 곳의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에서 그 날 저녁 공연될 헨델의 오페라 ‘라다미스토’를 구경하기 위함이 첫번째 이유였다. 두번째는 80년 전인 1930년 11월, 카를스루에에서 초연된 하랄트 요제프 퓌르스테나우(1905-?) 안무의 발레 ‘사랑의 시련’(Die Liebesprobe) 자료들을 발굴하기 위함이 또 다른 이유였다. 이 곳의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에서 1930년 초연된 ‘사랑의 시련’은 우리의 ‘춘향전’을 소재로 창작된 최초의 서양 발레작품이었다. 대한민국 무용역사에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카를스루에판 ‘사랑의 시련’은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 같은 사실을 좀 더 깊이 파헤치고 보다 풍부한 자료조사를 하기 위해 나는 카를스루에행 기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오페라극장 copy.jpg▲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오페라극장 (사진출처-Karlsruhe Badisches Staatstheater)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처음 찾은 카를스루에는 파리에서 기차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독일의 중소도시였다. 그러나 카를스루에행은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결실을 안겨주지 못했다. 수소문한 끝에 그 곳의 아카이브들을 전전하며 건진 자료라고는 1930년과 이듬해에 걸친 신문기사 몇 개가 전부였다. 1930년 11월 8일과 1931년 3월 20일자 카를스루에 타그블라트에 실린 ‘사랑의 시련’ 관련 기사에 따르면, 당시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 발레단이 이 발레단의 발레마스터였던 하랄트 요제프 퓌르스테나우의 안무와 루돌프 슈바르츠(1905-1994) 지휘 바디슈 슈타츠카펠레의 반주로 ‘사랑의 시련’을 두 차례 무대에 올렸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집중폭격으로 초토화된 카를스루에는 건물들만 폐허가 된 것이 아니라, 그 전까지 이 도시가 품고 있던 다방면의 수많은 자료들 또한 잿더미로 화해 버린 안타까운 역사를 품고 있었다. 그 같은 잿더미의 역사 속에 ‘사랑의 시련’ 자료들도 모두 공중분해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애당초 내가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작품이 한국의 원전 춘향전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최초의 발레작품이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6년 후인 1936년 4월, 남프랑스 모나코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된 미하일 포킨 안무의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이 우리의 원전 춘향전과는 판이한 각색버전이었음에 비해, 이보다 6년 앞선 카를스루에판 ‘사랑의 시련’(Die Liebesprobe)은 춘향전 그대로의 줄거리를 담고 있는 전 5장 구성의 오리지널한 발레작품이었던 것이다.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극장의 바그너 탄호이저 공연장면.png▲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극장의 바그너 탄호이저 공연장면 (사진출처-ⓒ Monika Rittershaus)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발레단의 지젤 copy.jpg▲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발레단의 지젤 (사진출처-ⓒ Jochen Klenk)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발레단의 공연장면 copy.jpg▲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발레단의 공연장면 (사진출처-ⓒ Jochen Kle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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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전 카를스루에에서 발레로 부활한 춘향전


나는 이 같은 사실을 2007년 10월, 포킨 안무 1936년판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 국내초연무대의 프로그램북에서 처음 밝혔다. 그 내용을 아래 인용해 본다.

“미하일 포킨(1880-1942)이 안무하고 앙드레 드랭(1880-1954)이 무대와 의상을 담당한 발레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은 1936년 4월 4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됐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 춘향전을 소재로 창작된 최초의 발레가 아니다. 1936년의 초연으로부터 6년 전인 1930년, 독일의 남부도시 카를스루에에서는 춘향전을 소재로 독일안무가 H. J. 퓌르스테나우가 안무한 최초의 발레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제목은 독일어로 ‘Die Liebesprobe’. 즉, 포킨이 안무한 발레제목과 동일한 ‘사랑의 시련’이다. 아쉽게도 당시 이 작품을 초연한 발레단과 극장, 정확한 일시, 안무, 무대와 의상 등의 세부사항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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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2 copy.jpg▲ 1930년 11월 초연 전후 카를스루에 타그블라트에 실린 발레 사랑의 시련 기사모음 (사진출처-Karlsruher Tagblatt)


그러나 다행히도 1930년 초연 당시의 대본작가와 대본내용은 알려져 있다. 1936년 포킨이 안무한 몬테카를로 판본의 대본이 원래의 춘향전에서 상당 부분 각색된 단막작품임에 반해, 1930년 카를스루에 판본의 이 ‘사랑의 시련’은 전체 5장의 구성 속에 원래의 춘향전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시 대본작가는 독일의 R. V. 모이지조비치였고, 대본에는 춘향과 월매, 이도령이 모두 등장한다. 춘향은 Chun Yang으로, 이도령은 I-Toryung으로, 월매는 Uhl-Mah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3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알파벳 표기가 독일어로 최초로 번역소개된 춘향전인 H. G. 아르노우스의 춘향전(1893)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1930년 카를스루에 판본의 ‘사랑의 시련’ 대본을 쓴 모이지조비치가 1893년에 출판된 아르노우스의 춘향전을 접한 후 발레대본으로 각색했음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이 카를스루에 판본에 관한 세부사항들은 몇몇 내용을 제외하면 소실된 상태다. 현존하는 전 5장의 대본내용은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당시 필자가 지면관계상 생략했던 전 5장의 대본내용은 이 기회를 빌어 아래에 소상히 공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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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시련>

*5장의 판토마임 발레
*(한국 전설을 바탕으로 한) 대본구성: 로데리히 폰 모이지조비치
*음악: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안무: 미하일 포킨
*무대장치: 앙드레 드랭
*초연: 1936년 4월 4일,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Ballet Russe de Monte Carlo)
*극중인물: 
- 임금
- 다른 지방으로 전임한 사또
- 과거를 준비하는 그의 아들 도령
- 국가무용수(기생)의 계급에 속하는 월매
- 국가무용수(기생)인 그녀의 딸 춘향
- 새로 부임한 사또
- 간수
- 장님인 점쟁이
- 도령의 하인
- 문지기
- 시대: 한국의 과거

1장: 도령의 방, 월매의 거처
Allegro (KV 106, 서곡), Allegretto (Nr.1 KV 106/1), Vivace (No.3), Andantino (No.2), Presto (Nr.4)
합격하기 쉽지 않은 국가시험(과거)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도록 일체의 세상사와는 담을 쌓은 도령은 그러나 우연히 보게된 춘향에 반하고 만다. 그들은 진지한 마음으로 혼인하기로 언약하지만, 도령은 보다 높은 소명으로 인해 떠나야 하는 신세다. 두 애인은 신의를 맹세한다.

2장: 춘향의 방
Allegretto (No.5, KV 106/2)
도령과의 혼인서약은 홀로 남겨진 춘향의 유일한 위안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사또가 부임하고 미모의 춘향을 아내로 만들고 싶어한다. 춘향은 도령과의 언약을 이유로 신임사또의 뜻에 불응하지만 결국 사또에게 붙잡혀 가고 만다.

3장: 궁궐 앞
Allegro (no.7), Allegro (No.8), Andante (Nr.9), Allegro (No.7)
도령은 과거시험을 치른다. 임금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도령을 크게 칭찬한다. 도령은 임금으로부터 왕의 도장이 찍힌 증서를 받고 고향에서의 높은 지위 또한 얻는다.

4장: 감옥
Adagio (No.6)
사또의 관아에 갇혀있는 춘향은 꿈을 꾼다. 장님인 어느 한 점쟁이가 그녀에게 길몽임을 점쳐준다.

5장: 신임사또의 관아
Allegro molto (No.10), Andantino (No.11), Allegretto (KV 603, Nr. 12), Allegretto (No. 13), Allegro (Contretanz, KV 462), Marcia 행진곡 (KV 214)
등불축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다. 거지로 변장한 도령은 사또를 시험한다. 그런 연후에 자신이 임금의 암행어사인 사실을 알린 뒤 부정부패한 관리를 체포한다. 괴로움을 꿋꿋하게 참아내며 정절을 지킨 춘향은 가마를 타고 들어온다. 기쁨이 최고조에 이른 가운데 두 사람이 재회한다.

단막의 발레희유곡 ‘사랑의 시련’은 1928년 루드비히 자이츠에 의해 그라츠에서 슈타이어마르크의 음악회(Steiermaerkischer Musikverein)의 수집에서 사본으로 발견되었다. 제목은 ‘희유곡’(Divertißment), ‘소집’(Regrutierung) 또는 ‘사랑의 시련’이다. 희유곡의 대부분은 모차르트의 콩트르당스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음악학자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내 생각에 그라츠에서 발견된 이 사본은 카티씨의 ‘신병’(Der Recrut)이라는 3막의 희유곡과 관련되어 있는바, 이것은 1838년 7월 비엔나 캐른트너토어 극장에서 초연된 것이다. 음악은 여러 작곡가의 것이다.” 라고 말했다.
바이에른 국립오페라는 ‘소집’을 1953년 6월 프랑켄 지방의 축제주간 당시 바이로이트 마르크그라펜 극장에서 피노 믈라카와 피아 믈라카의 공동안무와 자이츠가 발견한 총보를 바탕으로 해서 공연했다. 여기에는 한국인의 사랑의 번민 또는 한국여인의 정절 같은 것은 없다. 대신 전원의 풍경에서 농부와 리젤이라는 그의 딸, 그리고 히아즐이라는 정부, 하사관, 종군상인 여인네, 농부의 아내, 군인들, 소년, 소녀들이 등장한다.

줄거리의 요지는 애인들은 떨어져 지낼 수 있어도 사랑 그 자체는 식지 않는다는 것이다. 믈라카의 안무는 뫼리케가 ‘프라하로 여행하는 모차르트’에서 그리고 있는 전원풍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무대 장치는 헤르베르트 케른이 만들었다.)
1936년에 행해진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이라는 제목의 초연은 주제를 한국에서부터 중국의 문화권으로 옮겨 가상 속에나 존재하는 중국풍의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몬테카를로에서의 초연의 주인공은 베라 넴치노바와 앙드레 에글레프스키가 맡았다. 대본내용은 드랭의 무대구상에 따라 바뀌었다.


이상, 기술한 내용들은 오토 프리드리히 뢰그너가 쓴 레클람 발레사전(1956)에 수록되어 있는 ‘사랑의 시련’ 관련항목을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뢰그너가 서술한 위의 내용들은 1936년 몬테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된 포킨 안무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보다 6년 앞선 1930년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퓌르스테나우 안무의 ‘사랑의 시련’(Die Liebesprobe)에 관한 해설이다. 따라서 저자인 뢰그너 자신이 퓌르스테나우 버전과 포킨 버전을 혼동했을 보여주는 실례인 것이다.
어떻든 카를스루에는 우리의 ‘춘향’ 발레역사에 있어서 미스터리를 품고 있는 도시임에 분명하다. 그런 카를스루에에서 84년 전 초연된 한국 최초의 발레 ‘춘향’=‘사랑의 시련’(Die Liebesprobe)에 관한 속시원한 자료가 발굴되어 이 고색창연한 작품이 무대에 올려질 수만 있다면 그만한 경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날이 오기를 미약한 가능성으로나마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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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한 음악의 도시, 카를스루에


발레 ‘사랑의 시련’에 대한 얘기에만 몰두한 감이 있지만, 카를스루에는 명실상부한 서양고전음악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그 곳에는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1808년 당대의 유력건축가 프리드리히 바인브레너에 의해 처음 건립된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은 1810년 궁정극장으로 격상된다. 1847년에 있은 대화재로 소실된 극장은 이후 1853년 하인리히 휘브슈에 의해 재건되어 90여 년의 영화를 누리다가 1944년 2차세계대전 중에 있은 연합군의 대공습으로 완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지금의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은 1975년에 새로운 부지로 옮겨가 건립된 것이고, 예전의 자리에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위치해 있다. 1977년 이후부터는 카를스루에에 자리한 헨델연구소와 공동으로 매년 2월, ‘헨델 페스티벌’이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에서 열리고 있다. 내가 찾아간 이 날도 ‘2010 헨델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헨델의 오페라 ‘라다미스토’가 상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대의 완성도는 그리 걸출한 편은 못 되었다. 그럼에도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이 품고 있는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 즉 바디슈 슈타츠카펠레는 숨겨진 유럽의 보석과도 같은 오페라극장 전속 오케스트라다.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극장 오케스트라(바디슈 슈타츠카펠레) copy.jpg▲ 카를스루에 바덴 주립극장 오케스트라(바디슈 슈타츠카펠레) (사진출처-Uli Deck)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인 1662년 바덴 두흘라흐 신성로마제국 후작의 궁정악단으로 창단된 이래, 이 오케스트라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관록파 악단으로 지금껏 군림해 오고 있다. 1743년부터 1765년까지 당대의 유력 독일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한 멜키오르 몰터가 카펠마이스터로 봉직했고, 19세기초에는 당대의 유명작곡가인 프란츠 단지와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잇달아 이 악단의 수장으로 있었다.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헤르만 레비와 펠릭스 오토 데소프, 펠릭스 모틀 같은 당대 지휘계의 거성들이 궁정카펠마이스터로 있었다. 이 같은 유구한 전통은 20세기가 되어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다. 왕년의 명지휘자 요제프 크립스와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그들의 젊은 날 바디슈 슈타츠카펠레의 수장으로 재임했으며, 근래에는 귄터 노이홀트와 오노 가즈시 같은 명지휘자들이 이 관록의 악단과 동고동락했다. 2008년부터는 영국의 저스틴 브라운이 음악총감독으로 재직중이다. 애석하게도 카를스루에를 찾은 이 날, 나는 전통의 바디슈 슈타츠카펠레의 연주회에 임석하지 못하고, 페터 반 헤이겐이 지휘하는 도이치 헨델 졸리스텐의 연주회를 바덴 주립 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들이 남긴 희귀음반을 몇 장 구해 갖고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중 귄터 노이홀트가 지휘한 프란츠 슈레커와 알반 베르크의 음반과 오노 가즈시가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음반은 지금껏 나의 애청반으로 남아 있다.

작년 늦가을 한국을 찾은 노이홀트에게 그 같은 카를스루에에서의 기억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마에스트로 왈,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교향악단과 로열 플란더스 필, 카를스루에 바디슈 슈타츠카펠레, 브레멘 필, 빌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두루 섭렵한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카를스루에에서 보낸 6년(1989-1995)이 가장 인상깊은 시간이었다라나.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음악도시로서의 카를스루에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사람들이 다 가는 잘츠부르크와 비엔나, 런던, 파리, 베를린 같은 유럽 유수의 클래식 메트로폴리스가 아니라, 남들이 보고 듣지 못한 음악의 비경을 찾는 당신이라면 카를스루에에 기착할 지어다. 그 곳에는 열 중에 아홉이 간과하지만, 오로지 나머지 한 명만이 알아볼 수 있는 온갖 음악의 비경이 당신을 맞이할 테니 말이다. 음악이 그대를 친절히 안내해 주기를 바라지 않고, 그대가 음악을 발굴할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당신이라면 카를스루에의 묘미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카를스루에만의 비경은 음악의 기착지로 알고 들렀던 곳이 종착지가 되어준다는 사실에 있을 지니.




김승열 프로필 뉴.jpg


[최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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