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과거와 현재의 담론을 외치는 최선의 개인전 : 메아리[시각 예술]

글 입력 2015.03.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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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은 송은문화재단에서 미술문화 발전을 위해 제정한 ‘송은미술대상’의 제12회 수상 작가로 선정되었다. 지난 11회(2011년)부터 대상 수상 작가에게는 상금과 함께, 수상 연도로부터 2년 이내에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의 개인전 개최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는 2012년 제12회 대상 수상 작가인 최선의 개인전 '메아리'2월 13일부터 3월 28일까지 선보인다. 우리가 흔히 아는 메아리는 시간차를 두고 다시 되돌아오는 존재이다. 사라진 것 같았지만 다시 되돌아와서는 더 크게 요동친다. 최선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작가의 개인적인 과거 기억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덤덤해질 수 있는 사회적 문제들이 다시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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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전시에서 엿볼 수 있는 작가의 사회적 통찰은 기존 세대들이 정의한 미학적 개념들과 미술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시작 된다. 그는 작가로서 현대미술에 대한 고민과 탐구 없이, 누군가 정해놓은 미학적 개념이 타당하고 옳은 것인 마냥 따라가는 태도에 대해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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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똥 (적분의 그림), 알루미늄 위에 우레탄 페인트, 360 X 480cm, 2014


 빨간색 바탕을 거침없이 휘저은 흰색을 처음 보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꽃잎이었다. 그러나 <피똥(적분의 그림)>이라는 작품 제목을 알고 나서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어떤 사람은 도슨트 설명을 통해 <피똥>이라는 작품 제목을 듣고 나서는 감상자를 조롱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불쾌해하며 나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극단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마치 작가는 이러한 상황까지도 모두 예상하고, 보란 듯이 <피똥>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만 같다. 

 최선은 추함과 아름다움의 경계선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의도적으로 이중적인 것을 나란히 놓는다. 그 둘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것 또한 고정적 관념의 ‘미(美)’이기 때문이다.작가는 이중적인 것들이 단지 상대적일 뿐, 어느 것을 더 나은 아름다움의 가치로 높이 세울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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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똥 (적분의 그림), installation view (2F)


 나 또한 추상적으로 보였던 이 작품이 아름답게 느껴져서 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 했었다. 꽃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고, 아름다움으로 보여질 수 있으나, 피똥이 꽃처럼 표현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인가? 작가는 아름다운 것이 추함이 되고, 추한 것이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는 것이 미적 포장에 따라 한 끝 차이에 불과한데도, 그동안 얼마나 우리가 고정적인 미적 관념에 갇혀 있었는지 깨달음을 안겨 준다.


 진정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 채, 정의하는 이론도 그럴듯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소위 말하는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처럼 간주 되어온 미술이론을 상대로 소신을 펼치는 일을 작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작품을 통해 이를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세력권들 사이에서는 미운오리새끼역할을 도맡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최선의 작품은 작가가 오랫동안 틀에 갇힌 미학적 개념과 씨름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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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 캔버스 위에 잉크, 160 X 914cm, 2014


 주변인들의 등 돌림과 소외에서 나온 고통들은 최선만의 작품으로 승화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의 작품을 보면 유독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 보인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작가라는 위치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작가라는 위치를 내려놓고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최선은 미술가라는 위치를 특별하게 포장하기 보다는 자세를 낮춰 진정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나비>, <내 숨이 멈춘 그 자리에서 너의 숨은 시작되고>, <소식>은 같은 연장선 상의 작품들이다. 세 가지 작품은 모두 제작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의 숨을 받아 완성한 것이다. 인간의 ‘숨’이 붓 터치로 나타낼 수 없는 또 다른 생기를 작품에 불어 넣었다. 가장 아름다운 악기 소리를 인간의 목소리라고 표현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숨이 인위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또 다른 형식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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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 (detail), 캔버스 위에 잉크, 160 X 914cm, 2014


 <나비>는 안산 아시아 아트 페스티벌에 참여한 작가가 시장을 오가던 시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물감 위에 숨을 불어넣어 만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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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식, 캔버스 위에 잉크, 144 X 102cm, 2015


 또한 <소식>은 여수 한센인촌의 할머니들의 숨으로 그려졌다. '소식'이라는 단어에서 '식(息)'은 '숨쉬다', '호흡하다'의 의미로도 쓰인다. 작가는 소식을 나누는 것이 숨을 나눠 마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한 사람의 숨을 이어 받아 다른 사람의 숨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한데 합쳐진 형태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니, 마치 그림이 세상 사는 이야기처럼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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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숨이 멈춘 그 자리에서 너의 숨은 시작되고, 숨, 종이, 먹, 218 X 314cm, 2011


 작가는 <내 숨이 멈춘 그 자리에서 너의 숨은 시작되고>라는 작품이 아직 미완성된 상태라고 말한다. 이 그림이 또 다른 사람들의 숨이 모여 완전한 검은색 화면으로 채워질 때야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것이야말로 작가가 원하는 숨으로 가득 찬 그림, 생명력 넘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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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숨이 멈춘 그 자리에서 나의 숨은 시작되고, (detail), 숨, 종이, 먹, 218 X 314cm,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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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stallation view (3F)


 최선은 스스로를 ‘손 없는 화가’라고 표현한다. 화가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작품의 직접적인 제작 과정에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길을 지나가는 평범한 사람들, 한센병 환자들 등은 모두 최선의 작품에서 화가가 된다. 화가 최선이 스스로를 낮추고, 이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자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선은 일반인은 그릴 수 없는 뛰어난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면서 대중으로부터 우상을 사는 화가가 되길 원치 않는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대중들은 여전히 현대 미술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미술을 난해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중들과의 거리를 좀 더 좁히고자, 누구나 그릴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도 물감을 불어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최선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재료에 집착하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제작에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품의 재료 또한 일반인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얻어낸다. 그동안 작가들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서 대단한 것처럼 대중들 앞에 보여주었다면, 최선은 물감조차 버리고 재료를 구걸하여 그려보겠단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작가가 원하는 작품의 재료가 무엇이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졸라서 얻어냈다고까지 표현할까.


 최선의 2005년, <동냥젖>이라는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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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냥젖, Breast milk on cotton, 53.3 X 45.7 cm, 2005


 아이러니 하게도 작가는 겸손한 태도로 대중들이 진정성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작품을 만들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젖을 발라내어 그렸다는 이유만 듣고 나서는 기괴하고 망측하다고 생각한다. 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도 소통의 어려움은 마찬가지이다. 현대판 심봉사 처럼 작가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들에게 다가가 젖을 얻어야 했다.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전에 불쾌함을 느끼고 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모유'를 재료로 하여 작품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피똥>이라는 작품 제목을 보고 나서,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기도 전에 불쾌감을 느끼고 나가버렸던 사람과 같은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

 대중 스스로도 무의적으로 예술작품은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응들이다. 그러나 <피똥>과 <동냥젖> 두 작품 모두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생각이나, 진심을 알고 나면 다시 고개가 끄덕여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림이 작품이라고 있어보이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냥젖>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신 이상자 취급까지 받으며 무려 6개월간의 고생 끝에 나온 작품이다.


 아마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대중들과 작가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위한 시작은 누군가 한쪽이 진득한 인내심을 가지는 것에서 부터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최선처럼 작가 스스로가 낮아지면서 끊임없이 대중들과 소통하려하거나, 감상자들이 겉으로 보이는 작품의 텍스트나 시각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작가의 생각을 읽어내려는 인내심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최선은 이러한 인내를 작가의 소명의식처럼 생각하고 몸소 작업과정을 통해 보여주었다. 처음엔 이러한 시도가 스스로도 무모하게 느껴졌지만, 무명 시절 작가가 스스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정도가 되었었고, 주변에서 잘 되고 있는 동기들을 보며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최선은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한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거짓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모유를 나눠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 때 작가는 자신의 진정성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자신감과 성취감,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값진 경험은 최선을 물감과 붓이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도 빈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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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금회화, 캔버스 천 위에 소금 결정, 80 X 100 cm, 2014


 또한 그는 서양의 모노크롬(monochrome:흑색 또는 그 밖의 한 색만 사용해서 표현하는 단색화나 일러스트레이션)을 가져와서는 '한국적 모더니즘이'라는 이름만 거창하게 붙여 대중을 속이는 일부 미술계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
 
 대학 시절, 최선은 이처럼 윤리의식이 결여된 일부 미술계에 대해 실망을 하고, 작가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엄격해지려 노력한 것 같다. 최선이 제시한 대안은 사회적 담론을 통해 현대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미술계의 문제를 꼬집는 것에 그쳤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테지만, 대안까지 제시 했다는 점에서 최선이라는 작가가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내․외적 갈등을 겪어왔을지 예상할 수 있다. 

 <소금회화>, <검은 그림>은 각각 세월호 참사, 태안 반도 기름 유출사건과 같은 사회적 담론을 끌어들인 모노크롬 형식의 작품이다.

 <소금회화>는 바닷물에 천을 담그고 말리기를 수십 번 반복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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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그림, 캔버스 위에 폐유, 193.9 X 130.3 cm, 2015 Remake


 <검은 그림>은 다 쓰고 버린 폐유를 발라 만든 작업이다. 작품이 걸린 곳의 밑바닥을 보면 폐유가 흘러내린 흔적이 있다. 폐유는 마르지 않기 때문에 손으로 문지르면 금방이라도 색이 묻어나올 것처럼 보인다. 형태가 고정되지 않도록 만든 단색화 형식의 검은 그림이다. 

 보통 그림은 물감이 마르고 나면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영원히 마르지 않는 그림이라니, 마치 작품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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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 그림, (detail), 캔버스 위에 폐유, 193.9 X 130.3 cm, 2015 Remake


 <소금회화>와 <검은 그림>은 물감이 아닌 비예술적 재료가 곧 그림이 된다. 이를 통해 현대미술에 고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현상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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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 침, 캔버스 위에 침, 53 X 45 cm, 2014


 단색조의 미학적 개념 정의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고자 하는 작가의 생각은 <쓴 침>이라는 작품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윤리 의식이 결여된 일부 현대 미술계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었던 작가가 입이 너무 써서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침을 뱉어 말린 작품이 바로 <쓴 침>이다. 

 이쯤 되면 작가가 너무 회의론자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과 예술의 정체에 대한 고민 없이 한국적인 현대미술을 감히 논하는 상황에서 소신 있게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은 오히려 양심 있는 작가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화가가 의식도 없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며 부와 명성을 쫓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스스로 반성하며 자세를 낮춘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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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 : 메아리' Artist Talk 행사 현장


 3월 6일에 열린 Artist Talk에서 최선 작가가 가장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나왔다. 쑥쓰러워하며 작가는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들 중 하나가 ‘친구 100명 사귀기’라고 대답했다. 작가의 역할에 엄격한 기준을 세우는 작업과정과 달리, 사람들과의 연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최선은 "빈 손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뉴욕 소재의 ISCP(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 레지던시에 입주할 예정인 작가는 미국에 다녀온 후, '"잡종이 되어 돌아오고 싶다"고 덧붙였다.


 '잡종'이 되어 돌아오고 싶다는 표현은 작가 스스로 또 다른 성장을 통해 다방면의 담론을 다루고 싶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개인적으로 다음 작업 과정에서는 작가 최선의 인간적인 모습을 살리거나, 사회의 긍정적인 부분까지 다룬다면 더 폭 넓은 작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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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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