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frei aber einsam [문화 전반]

글 입력 2015.05.0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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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한 교복의 티를 벗고 갓 대학에 입학해서 설레던 대학교 1학년의 봄. 돋아나는 새싹들이 옅은 찬바람에 고개를 내밀고, 떨어지는 벚꽃이 어깨를 두드리던 그 봄. 나는 그 내음에 취해 끝을 알 수 없었던 짝사랑에 빠졌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그 사람은 멋진 손으로 기타를 쳤다. 남자가 태어나서 두 손으로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할 수 있는 무언가 있다면 아마 기타를 연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연주하는 기타 소리는 마음을 울렁이게 또, 고백할 수 없는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한 인식 때문인지, 나는 왠지 그가 팝이나 락 음악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 외로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사실 난 그 전까지만 해도 클래식 음악은 음악시간에나 듣는 따분하고 지루한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그는 종종 나에게 내 기분에 맞는 음악 파일들을 보내주곤 했는데, 덕분에 좋은 클래식 음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같은 곡들을 다른 장소에서 듣고 있다는 생각에 밤새 설레기도 했다. 나는 특히나 자장가 종류들을 좋아했다. 걔 중에서도 브람스의 자장가가 나에게는 으뜸이었다. 반복해서 듣다보면 신기하게도 평온한 기분에 몸이 나른해졌고 불면증도 그 즈음 사라졌다. 학창시절 브람스라는 작곡가에 대해 암기식으로 듣긴 했지만, 그의 음악에 반하고 나서야 그 이름이 마음에 꽂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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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Johanes Brahms)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낭만주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그는 북독일 특유의 감성인 회색빛깔 음악을 들려준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침잠된 감정과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칙칙, 탁탁, 우울, 음산, 사색, 고독이 그의 음악적 키워드들이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frei aber einsam)라는 표현은 그를 잘 나타낸다. 

Guten Abend-Guten Nacht, Johanes Brahms
 

앞서 말했듯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곡은 자장가 Guten Abend-Guten Nacht 작품번호 49번의 네 번째 곡(Op.49-4)이다. 이 곡은 브람스가 생전에 가까이 지냈던 여인 베르타 파버(Berta Faber)가 둘째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만든 곡이다. 그녀는 브람스가 함부르크에서 여성합창단을 지휘하고 있을 때 합창단원으로 당시 독신이었고 노래도 잘했었다고 한다. 그는 왈츠를 즐겨 부르던 알토 가수 파버를 위해 2박의 틀을 깨고 3박자의 곡을 작곡하여 그녀에게 헌정했다. 이 곡은 다른 브람스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따듯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클래식을 들으면 재즈와는 다르게 풍경들이 떠오른다. 이 곡의 당김음은 어린이를 달래고 어루만지는 것 같은 모습, 선율은 온화하게 요람을 흔들며 아이를 재우려는 듯한 앳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브람스의 사랑스럽고 따듯한 일면을 보여주는 가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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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만 바라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닌 짝사랑.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도 세상에 있는 법이다. 브람스도 짝사랑으로 유명한 작곡가였다. 브람스는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슈만을 찾아갔었다. 슈만은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즉시 자신의 음악 평론지 「음악 신보」에 ‘세상을 뒤집어 놓을 참다운 시도’, ‘젊은 혈기’라는 표현을 쓰며 그를 세상에 알렸다. 슈만은 당시 브람스보다 23살이 많았던 유명한 음악가이자 평론가였다. 브람스는 자신보다 14살이 많았던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를 몰래 연모했다. 슈만은 심한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했다가 구조돼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후에도 브람스는 클라라를 물심양면을 돌보았다.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도 급격히 쇠약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삶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했던 가치였으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애틋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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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유명한 여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의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시몽은 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며 서신에 그렇게 적어 보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연상의 여인 폴과 젊은 남자 시몽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브람스의 삶과 이 작품은 닮아 있다. 브람스 역시 평생 동안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몰래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야기 속에서 시몽이 폴을 브람스의 작품이 연주되는 음악회에 초대하도록 한 것도 이를 암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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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OST 중에는 브람스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Hungarian Dance 헝가리안 무곡도 포함되어 있다. 느리고 우울하다가 빠르고 야성적이게 변하는 곡으로 5번이 가장 유명하다. 이 곡은 클래식도 좋고, 리드미컬하고 빠른 템포의 곡이라 그런지 재즈 버전도 좋았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로 어우러진 곡은 고급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주면서 19세기로 돌아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중후한 남자와 손을 잡고 빠르게 왈츠를 춰야 할 것만 같았고, 일렉기타와 드럼의 합주는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Hungarian Dance No.5, Johanes Brahms


Hungarian Dance No.5 ver. metal, Johanes Brah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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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음악은 당대의 화려한 음악들과 대조를 이룬다. 19세기 중반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등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이전의 음악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한 예술로 치부하고 오직 청중들의 감정을 격랑에 몰아놓는 음악만을 진정한 예술로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 브람스는 음악이 반드시 격정적이어야 하는 것도, 혁명적인 구조를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소나타, 캐논, 푸가도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고전주의 시대에 두고, 형식과 질서를 작품에 그려내려고 했다. 브람스는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다르게 제목 없는 순수음악, 외적인 상념을 갖지 않은 절대음악을 추구했다. 낭만주의자로서 그의 혁신적인 화성이나 관현악법, 다채로운 음색들은 모두 이런 기준 속에서 만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브람스는 고전적 형식 속에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작곡가라 할 수 있다. 

Symphony No.3 3rd movement, Johanes Brahms

브람스는 마흔 살이 넘어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다. 그는 구상에서부터 완성까지 무려 2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베토벤을 의식하여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만든 작품은 구조적으로 탄탄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평생 걸쳐 추구했던 고전형식의 음악적 구조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 중에서 들은 것은 교향곡 3번의 3악장이다. 이 곡은 브람스의 다른 곡과는 다르게 달달하고 신비로운 꿈같은 느낌을 준다. 이 음악은 영화에서도 많이 쓰였는데, 브람스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한 느낌을 준다. 찾아보니 이 곡은 멜로디가 아름다워서 다른 음악가들에게 여러 버전으로 연주되었다. 로맨틱 버전, 에로틱 버전등 다양한 스타일로 편곡되어 있다. 그래도 나는 역시나 원곡이 훨씬 마음 속 깊이 와 닿았다. 이 전까지는 자장가가 가장 좋았는데, 이 곡을 듣고 나니 또 다른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가끔 우울한 감정의 상태를 느끼면 심장에서 뭔가가 쏟아 오르며 빨리 뛰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곡을 듣자마자 딱 그 느낌이 왔다. 사실 좋은 느낌은 아닌데, 그만큼 이 곡이 사람의 심연을 자극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거 같다. 가사도 없는 음악으로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이 전의 불안한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고, 아물었던 상처들이 다시 흉터가 되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클래식을 좋아했던 그 오빠는 클래식이 왜 좋아? 라는 나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 없는 곡을 만들어 낸 그들이 너무 위대하고 듣고 있으면 감탄이 계속 나온다고. 이제야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것 같다. 

병에 걸린 브람스에게 의사는 즉시 철저한 식이요법을 시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러자 브람스가 말했다.
 “슈트라우스 씨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어쩌죠?”
“절대 안돼요.”
갑자기 해결책이라도 생긴 듯 브람스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내일 왔다고 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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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엘리자베스 룬데이 지음, 도희진 옮김,『위대한 음악가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 시그마 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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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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