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 여름날 여우비처럼 스쳐간 인연,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시각예술]

글 입력 2015.07.0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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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_네이버 영화)
 

  극장의 한 귀퉁이에 가지런히 꽂혀진 포스터들이 보인다. 실제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을 담은 포스터들이 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정갈한 수채화 한 폭을 그려낸 포스터가 있다. 마치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보는 듯, 은은히 빛나는 빛과 어우러진 숲길 사이로 두 남녀가 걸어오고 있다. 아름다운 파스텔 톤의 색감은 해가 다 지지 않는 여름밤 특유의 청량감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6월 11일 개봉한 영화, ‘한 여름의 판타지아’는 나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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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지방 소도시인 고조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펼쳐진다.
  흑백으로 이루어진 1부는 영화를 제작하려는 감독 ‘태훈’과 조감독 ‘혜정’ 그리고 그들이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이 영화를 구상하기까지의 현장 사전 조사 과정이 담긴 감독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듯했다. 그렇기에 어떠한 감정이입도 존재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은 담백하고 절제된 느낌이다.

  이렇게 구성된 1부는 고즈넉한 고조시의 배경과, 그곳에서 한데 모여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없이 잔잔하다. 어떻게 보면 정처 없이, 고조시와 그곳에서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노하라의 골목길 구석구석을 마냥 맴도는 이들의 행보에서 겉도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인적 없는 그 길을 따라 내가 느꼈던 것은 왠지 모를 ‘사람 냄새’였다. 과거 전쟁 이후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남겨진 적막한 도시에서 사람 냄새를 느끼다니. 그건 아마도 모두가 떠나고 남은 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살고 있던 혹은 새로이 터전을 잡고 살고 있던 할머니와 그 아들,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대접하는 카페주인, 고조시 곳곳을 안내해주던 유스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손 한번 잡고 싶어요, 할머니” 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던 태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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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의 프레임 속 폭죽들에 하나둘씩 색이 입혀지며 2부가 시작된다. 비로소 색을 갖게 된 고조시는 흑백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2부는 고조시로 여행을 온 ‘혜정’과 우연히 그녀를 안내하며 동행하게 되는 ‘유스케’의 이야기이다. 어떠한 안면도 없는,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도시에서의 자연스러운 만남에 몸을 맡긴다. 그저 흘러가는 바람처럼,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이들의 만남부터 기약 없는 헤어짐까지, 우리는 혜정 혹은 유스케가 되어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처음 봤을 때 느꼈어요. 이야기 하고 싶고, 같이 있고 싶다고.” -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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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와 2부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겠다. 1부에서 영감을 얻은 태훈이 여러 소재를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영화 한편이 2부가 될 수도 있고, 1부에서 1년 전 자신이 안내했던 한 여인을 언급한 유스케의 기억 일부가 2부에서 재생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상상이 무엇이 되었든, 분명한 것은 1부와 2부가 결코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각적인 배경부터 인물들이 찾아가는 공간, 삽입곡처럼 중간에 인물들에 의해 연주되는 노래, 각 인물들의 사연까지, 1부에서 얼핏 스쳐간 조각 하나하나가 2부에 녹아들며 새롭게 재현되었다. 
   
  필자는 2부를 유스케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다. 무심한듯 아닌듯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혜정과 유스케의 모습이 고요한 고조시를 꼭 닮은 듯 했다. 마지막 날의 여름밤이 다다르고, 잊지 않기 위해 혜정의 번호를 손등에 적어 간직했던 유스케. 헤어짐의 순간 뒤, 폭죽을 바라보며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의 회상에 잠긴 듯한혜정과 유스케의 모습 그리고 잔잔히 가슴을 적셔오는 이들의 눈망울. 소중했던 기억은 쉽게 바래지 않는 것처럼, 영화가 흑백에서 칼라로 넘어오며 그런 유스케의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린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를 만든 장건재 감독의 글에서 멋진 말을 발견하였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매직아워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해가 지평선 뒤로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기 전까지 20여분의 시간. 가장 아름다운 빛을 담을 수 있지만 짧은 시간 때문에 한 두 번 밖에 촬영이 허락되지 않는 순간. 고조의 해질녘 풍경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어쩌면 이 영화의 포스터가 이러한 ‘매직아워’의 짧은 순간을 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시각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함께했던 순간 그 자체를 추억하는 매직아워말이다. 

  이들의 어느 여름날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여우비와 같은 것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남아 잔잔히 떠오를 것 같다.


 
<영화 속 장면으로 만들어진 뮤직비디오. 노래만 들어도 벌써부터 설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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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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