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레알 솔루트, 비현실성과 현실성 사이의 줄타기

착실히 쌓아 올린 현실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
글 입력 2016.06.03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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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고등학교 동창인 형석과 민준 그리고 달구는 올 해로 서른 살이 된 암울한 청춘들이다. 형석은 일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주류백화점’을 물려 받았으나 길 건너편에 대기업이 거대자본으로 골목상권에 비집고 들어온 ‘종합 주류 할인 창고’에 수완에서도 물량에서도 밀려 망할 위기에 처해 있다. 무리하게 대출까지 받아서 ‘종합 주류 할인 창고’의 미끼 상품 전략을 흉내 내 보았으나 그마저도 실패하여 가게의 고급술들에는 모두 차압 딱지가 붙은 상태이다.

셋 중 유일한 기혼자인 달구는 형석의 가게 건물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서 때를 민다. 달구는 화장실에서 변을 보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내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형석의 가게 화장실을 자주 사용한다. 달구에게는 연년생인 네 명의 아이가 있는데 아내는 한 명을 더 낳자고 종용하고 있다. 지금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에 부친 달구는 아내의 요구를 피하느라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민준은 어플 개발로 한 몫을 챙기려는 IT 꿈나무이다. 민준이 개발하는 어플은 항상 기발하긴 하지만 투자자의 마음을 끌기에는 한 끗이 부족하다. 그러던 중 민준이 대박이라고 심혈을 기울인 어플이 투자자를 못찾자 그만 건달형제들이 운영하는 사채 돈에 손을 대고 만다. 하지만 출시한 어플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민준은 건달형제들에게 콩팥을 적출당할 위기에 봉착한다.

한달 전 형석과 민준은 크게 싸웠다. 형석이 가게를 살리기 위해 대출받은 돈을 민준이 자신의 어플 개발비에 투자하라고 종용하다가 크게 다투고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달구는 어딘가에서 구한 ‘레알 솔루트’라는 몹시 좋은 술로 이들을 화해시킬 자리를 마련하는데......





극장사진.JPG
 

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대학교 3학년 학생이다. 진로를 결정해 취업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매일 취업준비 인터넷 카페를 들락거린다. 불안감에 파묻혀 대외활동이고, 인턴이고 되는대로 주워섬기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신세 한탄을 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레알솔루트에 나오는 세 청춘도, 꼭 그렇게 불안하고 힘들어서 친구들과 만나 술잔이나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차압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술 상점을 운영하는 형석, 세신사로 아이 넷을 벌어 먹이는 달구, 사채를 쓰고 개발한 어플이 쪽박을 찬 민준. 처음부터 끝까지 극히 현실적인 극이다. 레알 솔루트의 주인공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재벌 2세도 아니고, 재벌 2세를 만나 팔자를 고치지도 않는다. 현실은 슬프고 암울하기 짝이 없지만, 레알 솔루트는 그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연극 연출 또한 현실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짜여 있다. 먼저 시간적 편집이 없다. 무대 위의 2시간은, 그 연극 내에서의 2시간이다. 다시 말해, 극 내의 시간 흐름과 현실의 시간 흐름이 동일하다. 삶의 한 장면을 그대로 잘라 무대 위에 내 놓은 것처럼 시간이 자연스레 흘러가면서 객석과 부대 사이의 벽을 최대한 흐릿해진다. 공간적 편집 또한 부재하다. 극은 동일한 세트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특정 세트가 여러 장소를 동시에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세트는 높은 완성도와 구체성으로 의도된 공간(주류 백화점)을 창조할 수 있게 됐다. 블랙아웃과 세트 전환 등의 ‘연극적 장치’가 없는 것 또한 무대를 현실적인 장소로 재탄생시키는 데 기여한다.

극본과 연기에서조차도 현실성을 살리려고 한 티가 확연하다. 대부분의 연극에서는 두세 군데에서라도 문어체 느낌의 대사가 튀어나온다.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위하여 일부러 문어체를 택했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레알 솔루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착실하게 구어체 대사를 구사한다. 배우들은 이를 뛰어난 연기력으로 구현해낸다. 레알 솔루트에 대한 후기에 꼭 배우들의 언급이 빠지지 않을 정도로 도드라지는 연기력이다. 연출과 편집을 최소화하고 배우들의 연기에 힘을 몰아주는 것 또한 모두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결정이라 할 수 있겠다.

왜 이리도 ‘현실성’이 중요한 키워드인가. 현실적이어야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이 무대 위에 올려진 이야기가, [무대 위]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구나, 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이어야, 상처를 끌어안을 수 있다. 레알 솔루트는 어디까지 무대 위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다. 이 시대에 상처받고 힘든 청춘들의 이야기다. 그런 극이 현실성이라는 키워드를 버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잘 짜여진, 현실적인 극이었다. 결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현실성에 집착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현실에 밀착해 있던 연극이 결말을 맞으면서 갑자기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달구 아내가 몇 백 병을 모아 놓은(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둔) 소주의 가격이 급등한 것. 로또를 맞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아마 확률도 로또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한 결말이다. 이는 새로운 희망이 된다. 민준은 사채업자에게 콩팥을 빼앗기지 않을 뿐 아니라 새로운 어플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고, 형석은 방문판매라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수 있게 된다.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은 돌파구를 찾는다. 문제는 해결되고, 극은 기쁘고도 즐겁게 막을 내린다.

이로써 공든 탑은 무너진다. 현실적인 극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마지막에 어이없도록 낙천적인 결말에서 와르르 붕괴한다. 연출자도, 감독도, 몰랐을 리 없다. 대부분의 청춘들은 이들처럼 힘들지만, 이들처럼 몇 천 만원어치의 돈벼락을 맞지 않는다. 대책 없는 낙천주의라고 비난해도 할 말 없는 결말이다. 그들은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말을 선택했는가.

진용석 작가 및 연출의 인터뷰에서 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작금의 청년들은 무언가를 박탈당했다고 느끼며, 무엇가에 대한 상실감에 시달린다. 이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찾은 가장 좋은 수단은 웃음이다”라고 말한다. 레알 솔루트는 ‘코미디’다. 현실이 힘들 때 그 현실을 버티게 해 주는 것은 냉소가 아니라 웃음, 또는 웃음의 환상이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을 속이더라도 잠시간 현실의 참혹함을 외면할 수 있게 해 주는 무엇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그 도피는 단순히 속임수나 기만 따위의 말로 치부할 수 없는 에너지를 우리에게 준다. 도피를 할 수 있는 피난처는, 다른 말로 쉼터이기도 하다. 다시 사막 위에서 달리기 전에 잠시 목을 축일 수 있는 오아시스다. 진용석 연출은 비현실성을 감수하더라도 이 연극이 그런 오아시스가 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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