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원한 사랑에 대하여, 영화 '노트북'을 보고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6.2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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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겁게 사랑했던 한 때의 풋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면? 함께 나이 들며 세월을 살아가다가 어느 날 한 사람이 기억을 잃게 된다면? 이것은 영화 ‘노트북’의 이야기이다. 얼마 전, 로맨스계 영화의 고전이라면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트북’을 보았다. 로맨스, 즉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시대에 상관없이 꾸준히 제작되고 사랑받고 있다. 그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감정임과 동시에, 삶을 구성하는 중심 성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늘 ‘진정한 사랑’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진정한 사랑’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오늘날에는 단절된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과 진지한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표현하지 못하고 미적거리거나, 애매한 관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썸’도 오늘날 우리 사랑의 단면이다. 이런 사랑도 우리가 갈망하는 진정한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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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트북’의 주인공은 노아와 앨리이다. 앨리는 도시에서 시골로 잠시 내려온 상류층의 자제이다. 한편, 노아는 시골에서 목수 일을 하는 청년이다. 노아는 놀이공원에서 앨리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는 놀이기구에 매달려 자신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떨어지겠다고 협박하며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녀에게 구애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앨리는 자유분방하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노아에게 호감을 느낀다. 앨리는 그를 따라 한 밤중의 도로 한 복판에 눕기도 하고,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가 그렇듯, ‘신분’은 사랑의 장애물이다. 앨리의 부모님은 가난한 목수인 노아를 싫어하고 둘의 사랑을 방해한다. 노아는 앨리가 떠나고 1년 365일 그녀를 향해 편지를 보내지만 앨리의 부모님이 그 편지를 가로채고 그 편지는 앨리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서로를 잊지 못하고 살던 중, 앨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류층 남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약혼을 한다. 그러나 노아의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고 그를 찾아가게 된다. 오랜 만에 만난 노아를 보고 그녀는 다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약혼을 파기하고 그와의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위의 이야기는 ‘노아’에 의해 진행된다. 나이가 들고 치매에 걸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를 위해 그는 매일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준다. 어떤 날은 기적이 일어나 앨리가 짧은 시간 기억을 찾기도 하고, 다시 기억을 잃고는 노아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매일 그녀를 찾아가 이야기를 읽어준다. 이 영화의 진정한 클라이막스는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신분 차이’를 극복한 진정한 사랑 이야기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는 ‘신분 차이’가 극복된 것에서 행복한 사랑이 성사되었다며 종결짓는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건 사랑이 맞다.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의 일부는 부정적인 환경 요소들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그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에 있어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시기가 지난 이후에도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그 ‘지속성’과 ‘영원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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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정적인 사랑’은 순간적이며 폭발적이다. 한편, ‘지속적인 사랑’은 부드럽고 온화하다. 이는 인내심과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이해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격정적인 사랑’의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지속적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지속적인 사랑’에 대한 관심은 격정적인 사랑에 가려져 있는 듯하다. 오늘날 증가하는 이혼률만 보아도 격정적인 사랑의 시기에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영원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작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진실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이 세계를,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난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랑을 사랑하며 당신을 통해 이 세계를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즉, 둘만의 관계가 부각되는 격정적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우리는 상대방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수용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추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랑’은 전적으로 둘만의 관계이지만 한 편으로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시각을 넓혀주는 광범위한 관계이다. 둘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랑은 위태롭지만, 서로를 통해 멀리 볼 수 있는 사랑은 서로를 성숙하게 한다. 영화 ‘노트북’에서 앨리는 상류층 자제와 축복받는 결혼을 포기하고 노아와의 사랑을 택한다. 이는 그녀가 노아를 통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격정적인 사랑의 시기를 지나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기반으로 지속적인 사랑을 했다. 그리고 한날한시에 생을 마감하고 영원의 세계로 가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이생을 떠나서도 지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오늘날 ‘썸’, ‘인스턴트 연애’에 익숙해져 있다. 또한 뜨거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많은 부부들이 다시 결별을 한다. 사랑의 방식에는 물론 옳고 그름이 없지만, ‘지속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면 격정적인 사랑을 하면서도 이러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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