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름다운 순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여행]

글 입력 2017.03.01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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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2학기 내내 동양미술사에 대해서 배웠다. 중국미술에 많은 비중이 치중되어있긴 했지만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반대로 일본회화였다. 대충 그린 것 같으면서도 색감이 매우 예쁘고 만화처럼 다가오는 일본의 회화는 정말 ‘일본’ 그 자체의 분위기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작품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봐도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일본에서 직접 눈으로 이 감동을 느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패키지여행보다는 자유여행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여행이란 빡빡하게 짠 일정대로 이동하는 것보다 자유롭게 이동하는 시간들 사이사이에 만나는 낯선 풍경들이, 낯선 사람들이 또 그렇게 만난 새로운 인연들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여행의 성격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친구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여서 일정 속에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다 보니 나도 어느 샌가 여행을 가기 전 시간을 빼곡히 나누어 마치 엑셀의 표처럼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 오사카•교토여행 또한 빈틈없는 일정을 다이어리에 열심히 적었다. 처음을 잘못 잠그면 모양이 흐트러지는 단추달린 옷과 닮은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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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름다운 순간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나는 이 글을 빌려 나의 여행에서 만난 이상하기도, 아름답기도 했던 기억들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실패한’ 여행이라는 것은 없다고, 어느 여행에서나 행복한 순간들은 존재하고 그곳에서 겪었던 경험들은 계속해서 가슴 속에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풀어나갈 이야기들은 ‘일정을 제대로 완료했는가?’에 대한 질문만을 놓고 본다면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사건들이다.


  오사카 일정 둘째 날, 여행 오기 전 그렇게나 고대하던 오사카시립미술관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일본카레에 푹 빠져있는 나는 현지인 카레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있는 혼마치역 근처 ‘보타니 커리(Botani curry)’를 먹기 위해 오픈시간인 11시에 맞춰 이동하였고 이른 점심을 먹은 탓에 미술관을 가기 전 배가 매우 고팠다. 굶주린 배를 참지 못하고 저녁시간이 되기 전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함박 스테이크를 먹었다. (물론 굉장히 맛있었다.) 배가 불러 행복해진 마음으로 덴노지 동물원 앞 공원을 지나 오사카시립미술관에 도착해보니 시간은 오후 4시 42분, 입구의 문이 닫혀있어 입장 마감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이른 저녁을 먹은 탓에, 공원 산책을 하다가 12분을 늦은 탓에 나는 특별기획전으로 하고 있는 <일본회화전>에 들어가지 못했다. 시간 하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바보 같은 나의 모습에, 또 아쉬움에 눈물이 나왔지만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일정 속 비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하나 돌아다니다가 신세카이를 들어갔지만, 축 쳐진 마음에 흥미를 잃어 뒤의 일정이었던 아베노 하루카스 전망대에 일찍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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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일본회화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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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일정, 나카자키쵸 고양이카페에서 만난 인생무상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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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이 가득한 나카자키쵸 카페거리의 모습)


  아베노 하루카스에 일찍 도착한 나는 건물 안에 있는 미술관에 가려했지만 그곳에서 진행 중인 특별전시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바로 위에 위치한 카페의 난간자리에 앉아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전망대에 올라가기 전에 있는 카페이다 보니 창가에서 바라보는 오사카의 야경이 매우 예뻤고 주위에 열심히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람들, 일본어가 가득 적한 대학 전공책을 펼치고 같이 공부하는 커플들을 보며 일본의 카페 모습도 우리나라와 다를 것이 없구나 생각하며 신기해하였다. 나도 책 한권을 가져와 이곳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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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카페라떼를 라떼아트가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마시며 오늘 내가 받은 선물들을 펼쳐보았다. 우메다역 안에서 충동적으로 들어간 일본 서점에서 구입한 일본 만화책, 나카자키쵸 카페거리에 위치한 고양이카페에서 선물로 받은 고양이 엽서, JAM POT에서 구입한 달빛을 머금은 목걸이. 17층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오사카의 야경을 보며 마시는 향긋한 커피 향기에 전시를 가지 못한 아쉬운 마음은 점차 풀리는 듯하였다. 아마 오사카시립미술관의 전시를 보았더라면 나는 아베노 하루카스에 위치한 카페에서의 여유를 즐기지 못했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야경을 바라봤던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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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노 하루카스 전망대에서 유리창에 하는 불빛쇼)


  교토를 가는 여행 4일차, 급행이 아닌 전철을 타고 교토에 도착한데다 길을 거꾸로 걷는 바람에 기모노 대여장소 예약시간보다 1시간을 늦었다. 예상대로라면 11시에 기모노를 다 입고 출발하여 교토국립박물관과 치샤쿠인에서 동양미술사 강의시간에 화면으로만 보았던 일본회화를 직접 눈으로 보는 일정이었다. 기모노를 모두 입고 나오니 시간은 12시, 그래도 가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빠르게 돌아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버스에 올랐지만 내려야하는 정류장을 놓쳐 그 다음 정류장에 급하게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은 교토의 고속도로 IC 한복판이었다. 너무도 황당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왼쪽에는 차도가, 오른쪽에는 무덤이 펼쳐진, 한국에서도 걸어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차 안에서 운전하고 가는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할까. 기모노 입은 한국여자애가 고속도로 한복판을 걷고 있으니.’ 하지만 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IC의 인도를 따라 내려가 일반차도를 찾는 것 밖에 없었다. 한걸음 떼기도 힘든 일본 전통신발(조리)을 신고 20분을 넘게 고속도로 IC를 걸었다. 누군가 나에게 교토에서의 특별한 경험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교토의 고속도로 IC를 걸었어! 그것도 기모노를 입고!”라고 할 것이다. 아마, 정말로, 이건 나밖에 해보지 않았을 경험이기 때문에. (고속도로 IC는 당시에 너무도 황당해 사진찍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은 내 기억 속에만 남겨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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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둑해질 무렵 니넨자카 산넨자카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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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워진 니넨자카 산넨자카의 풍경)


  시작부터 꼬여버린 교토에서의 하루, 마지막 코스인 니넨자카와 산넨자카 그리고 청수사(기요미즈데라)를 보기 위해 열심히 계단을 올랐다. 조금 어둑해질 무렵의 거리는 일본의 분위기를 너무도 가깝게 느낄 수 있었고 주변의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흘낏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다. 사진을 열심히 찍으며 청수사에 도착했지만 문을 닫을 시간인 저녁 6시가 넘어서 도착해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그 웅장한 모습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는 하루. 그 하루 속에서 나는 아쉬운 마음만을 간직한 채 니넨자카를 내려왔다. 기모노를 갈아입기 위해 니넨자카를 내려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예쁘게 칠해진 노을이 눈에 담겼다. 그런 하늘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가기 위해 열심히 각도를 잡았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볼 때면 괜히 마음이 울적하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한다. 교토에서의 추억을 한 장으로 요약한다면 아마도 나는 주저 없이 이 사진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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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던 고마운 교토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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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시가 넘어 도착해 입장하지 못한 청수사를 멀리서 지켜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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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레챠야의 모습)


  한 가지 새로운 인연을 적어보자면, 오사카 신사이바시에 위치한 ‘카쿠레챠야(炉ばた焼 かくれ茶屋)’에서의 일이다. 어딜 가나 한국인이 많이 보이는 오사카에서 좀 더 일본의 현지 느낌을 느껴보기 위해 찾은 술집이었다. 눈앞에서 음식을 만들어 대형 노를 이용해 손님에게 전달해주는 모습이 인상 깊어 오사카에 방문하면 꼭 가야겠다고 리스트에 적어놓은 장소였다. 예상한대로 역시나 직장을 마친 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기 위해 찾은 일본인들이 정말 많았고 쭈뼛쭈뼛 그 사람들 사이에 앉아 음식과 술을 시켰다. 저렴하지만 싱싱한 해산물 구이에 감탄하며 배를 채우던 중 옆에 앉은 할아버지께서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왔어요? 여행으로 온거에요?” 비록 서툰 한국말이었지만 그저 신기하였다. 일본음식 너무 맛있다고 말하니까 자기는 일본 음식보다 한국 음식이 더 좋다며 소주가 최고라고 하셨다. 옆에 앉은 여성분을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며, 여자친구는 중국인이라고 하셨다. 그저 간단한 내용의 대화가 오고갔지만 짧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대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사카 여행 중 그 장소를 방문한 일은 내 생각에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인연을 만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다음에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지라는 생각을 안고 숙소로 돌아갔다.



  오사카에서 전망대에 위치한 카페에 가지 않았더라면 카페라떼 한 잔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까? 내가 교토에서 모든 일정을 완벽하게 마쳤다면, 노을 사진 한 장에 깊은 고마움을 느꼈을까? 아마도 아니. 망친 일정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특별함을 발견했다. 때론 망가진 일정도 놀라움을 선사한다. 파우스토 브리치의 책 <100일 동안의 행복>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인생의 특별한 날들을 분석하다 보니 일상의 날들을 특별한 날들로 만든 것은 거의 늘 예상치 않았던 사건 혹은 아무튼 계획하지 않았던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나의 일본 여행기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될 것만 같다. 이번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아마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상황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실패한 여행'이라는 단어가 없듯이, '실패한 하루' 또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단어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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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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